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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지 Feb 03. 2023

여백의 미

쓰는근육 8

최근 얼마간 글을 쓰지 않고 지냈다.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상태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 테지만 확실히 '쓰기 싫다'라는 자의적 결정과는 확실히 결이 달랐다. '거부감'이라는 단어가 조금 더 가까운 단어일 듯싶다. 쓰기가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던 것 같다. 누군가는 권태기 같다고 했다. 권태기는 만연해진 매너리즘으로 생기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종종 권태기는 두려움을 동반한다. 헤어지자고 내뱉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오늘은 불편하지만 내일은 혹여나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불안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글과의 권태기를 맞이했던 것이 맞는 것 같다.


틀에 박힌 생각과 고리타분한 행위를 극도로 혐오한다고 여기저기 설파했으나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 강박적인 사람이다. 글을 쓸 때도 항상 카테고리를 나누고, 적어도 예시는 세 개를 언급해야 마음이 놓였다. 갑작스레 좋은 생각이 들어 즉흥적으로 완성한 글이 마음에 들 때 다음번에 그만한 글을 쓰지 못할 것 같아 망설이고, 쓰고 나서도 만족스럽지가 않았던 날이 많았다. 제목을 선정할 때도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규칙을 세워두고 거기에 매여 끙끙 앓고, 부제나 인용 등에선 띄어쓰기 하나 특수기호 하나도 통일시키겠다고 이전에 적어둔 글들을 다시 보고 또 보느라 진척이 없었다. 이 얼마나 미련하고 바보 같은 집착인가. 그런 내가 작아지고, 꼴도 봬기 싫고, 그러다 보니 그냥 이런 나의 나약함을 마주하기 싫어서 글을 밀어낸 것일 수도.


지구력이 약한 나는 그래서 일부러 강박을 두지 않고 글을 쓰기로 했다. 어느 날은 잘 쓰고, 어느 날은 못 쓸 수도 있지. 오늘은 두 세줄을 적었지만 내일은 원고지 100장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도 바이오리듬이 있는데 그런 불완전한 인간이 쓰는 글이라고 별 수 있을까. 종종 질서와 균형은 오와 열이 찍어낸 듯 오차 없이 딱 맞아떨어질 때보다 조금 헐겁지만 각자의 개체가 자연스레 엉겨 만들어 낼 때 더 잘 느껴진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꽉 들어찬 화면보다 조금 비어있는 구석이 주는 안정감에 더 많은 시선과 관심을 주게 됐다. 사람, 동물, 식물, 물건 - 많은 객체들과 관계를 맺어오며 깨달은 사실이다. 지금은 조금 엉성해 보여도 본인이 가진 구성요소를 조화롭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은 기어코 그 공백을 잘 활용한다는 진리. 여백의 미라는 것이 그냥 텅 비어있는 흰색 도화지가 아니라 무언가를 더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미국의 극작가 헤롤드 핀터 Harold Pinter의 작품 속에는 수많은 '사이(pause)'가 있다. 인물과 인물 사이의 침묵이다. 극이 극에 다다를수록 그 '사이'라는 여백이 주는 긴장감은 극에 달한다.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침묵 속 아직 보여주지 않은 인물들의 본성을 관객들은 그 사이에 상상한다. 몇 백명의 관객이 각각 그려내는 몇 백개의 캐릭터가 구구절절 글자로 꽉 채운 인물 설명보다 훨씬 가치 있다. 이건 공백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 나는 그것의 가치를 이제야 사랑하게 됐다.


아무것도 쓰지 않았던 잠깐의 시간 동안 나는 더 아름답고 무궁무진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차곡차곡 그 시간들을 빈칸 그대로 쌓아 두었다. 오랜만에 남의 글을 더 많이 읽고 생각하며 채워지지 않은 빈 화면에 앞으로 채워질 까만 잉크들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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