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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지 Sep 10. 2022

초록과 파랑 사이

쓰는근육 7


어릴 때부터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왜 어른들은 초록을 '파랑'이라고 할까? 신호등의 초록불도, 싱그러운 나뭇잎도 어른들은 모두 '파랗다'라고 했다. 유치원 대신 미술학원(그래 봤자 맞벌이 부부 아이들을 종일토록 맡길 수 있는 보육시설에 불과한 곳이었지만)에 다니며 한글만큼 색깔을 빨리 뗐던 나는 그때마다 엄마 옷자락을 흔들며 물어보았다. "저건 초록색인데 왜 파랗다고 하는 거야?" 하지만 바쁜 엄마는 내 손을 치며 말했다. "이렇게 흔들지 말고 정확하게 '엄마'라고 불러"


말하는 자도 모르는 말의 오리진(origin)을 찾아가는 것은 참으로 쓸데없는 일이다. 얼핏 세상의 이치를 다 아는 것처럼 보이는 나이가 되면서는 그 이후 누구에게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아직 의문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본인을 지칭하는 호칭은 정확했으면 좋겠지만 초록이니, 녹색이니, 청색이니, 파랑이니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 궁금하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여력이 없는 삶에 대해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점차 바보가 되는 일 같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파란색은 인류 세계에서 나름 '뉴웨이브'라는 기사를 본 적 있다. 자연에서 파랑은 초록의 변형일 뿐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고(사실 자연의 색깔은 너무 변화무쌍하여 종종 인간이 감히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헛되지만) 아직도 몇 개의 언어권에서는 파란색을 구분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빛의 삼원색에도 초록과 파랑은 구별되지만 누군가에게 세상은 그리 푸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하긴, 시인 이상은 <권태>라는 본인의 소설 첫머리에서부터 '초록이 권태롭다'라고 대뜸 외치는 걸 보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파란이 필요했을지도.


울창한 녹음 사이에서 새로운 물결을 발견하는 일도, 또한 산천초목의 자연을 하나의 색채로 받아들이는 것 모두 틀리지 않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파도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일일 수도 있겠다. 나도 모르는 시기에 찾아오는 크고 작은 일렁임에 멀미가 날 때, 잠시 눈을 감고 초록과 파랑 그 어느 사이를 유유히 가를 수 있는 일종의 여유라고 해야겠다. 물론 아무도 안 믿겠지만.



202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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