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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지 Jul 27. 2022

광활한 언어

쓰는근육 5

의외로 영문과를 졸업한 나는 영어를 제법 못한다. 그냥 잘 못하는 겸손이 아니라 진짜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전공을 잘 숨기곤 하는데 그러다 들키게 되면 여러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전 어학을 한 게 아니고 문학을 한 거거든요"라는 말인데, 실제로 많이들 모르는 사실이지만 영어학과 영문학은 하늘과 땅 차이다.


3학년 즈음되면 전공 강의실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보던 얼굴들이 늘어나는데 짓궂은 영문학 교수님들은 단박에  얼굴들에 질문을 한다. "공대생이  여기와 있나?", "경영학만 하기도 바쁠 텐데 어떻게 영문과를 복수 전공할 생각을  거야?" 그들 대부분은 영어영문학이 인문학이자 동시에 어학을 배울  있는 최고의 전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중 절반은 반학기 만에 자취를 감춘다. 영문학 수업은 대체로 영어라는 언어보다 영미 문화권을 살아온 작가의 글을 읽는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속에서 나를 찾는 과제가 나온다. 종종 리포트를 쓰며 작가가 되기도 하고,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신이 되었다가 미물이 되었다가, 슬라임처럼 자유자재로 본인을 바꿀  아는 자만이 좋은 성적을 얻을  있었다. 어느  갑자기 맞이한 타인의 죽음에 황망히 추모시를 읽는 시간을 갖는다거나 교수님이 좋아하는 영화  주인공이 되어 대사를 읊어야 하는  덤이다. 그런 'P'스러운 수업에 길들여진 나에게 영어라는 언어는 미지의 세계였다.


그렇지만 학점을 위해 결국 어학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었다. 한 학년에 한, 두 개는 어학 수업을 들어야 학점이 채워졌다. 그리고 종종 문학이 나를 배신한 적도 있었는데 졸업할 때까지 유일하게 학점 포기를 하게 만든 수업도 문학이었던 걸 보면 그다지 내가 문학에 자신 있는 것도 아니었던 듯싶다. 어쨌든 문학에 비해 까다롭고 딱딱한 어학 시간은 가끔 생물 시간 같기도 하고, 수학 시간 같기도 한 지극히 이과적인 수업이 많았다. 혀를 뒤집어 까며 '대 모음 변이'를 익힐 때 특히 그랬다. 그런 내가 그나마 제일 좋아했던 어학 수업은 '영어 어휘 분석'이었다. 이 수업은 영단어의 어원을 알아보고 그 어원에서 파생된 단어들을 분석하는 말 그대로 '영어 해부학 시간'이었는데 어휘를 짚어 올라가다 보면 신기하고 재밌는 것들이 많았다. 담당 교수님은 머리가 살짝 벗겨졌으나 젊을 때 꽃 미모를 발산하셨을 것 같은 남자 교수님이셨는데 첫날부터 시답잖은 어휘 농담을 하셨기에 큰 기대가 없던 수업이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어원이라는 것은 매우 광활하여 왜 천문학자들이 새로운 별을 발견했을 때 덕후처럼 좋아하는지 이해가 갔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cosmos'라는 단어였는데 고등학교 때 공부깨나 한다는 친구들이 읽어봤다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꽃향기 나는 SF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게 한 수업이었다. cosmos라는 단어의 일단 질서, 정렬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그중 'cos-'는 외면(surface)을 의미하기도 하여 우주의 cosmos와 화장품의 cosmetic이 실은 같은 어원에서 왔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니 '우주'와 '화장'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무한하고 다채로운 세계 건만 그 세계에 실존하지 않는 이상은 절대 알 수 없는 본연의 존재들이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반짝거리는 무언가로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덮을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그때 즈음 나만의 유니버스인 얼굴 팍에 하이라이터라는 것을 처음 그어봤던 것 같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글을 쓰고 말을 할 때면 단어 하나하나를 여러 번 곱씹게 된다. 그건 내 애물단지 같은 전공이 준 유일한 보물. 이 작은 단어 하나에도 우주가 있다. 광활한 언어의 세계를 탐험하는 히치하이커는 오늘도 이름 모를 문장에 또 한 번 착륙을 시도한다.



202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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