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근육 5
의외로 영문과를 졸업한 나는 영어를 제법 못한다. 그냥 잘 못하는 겸손이 아니라 진짜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전공을 잘 숨기곤 하는데 그러다 들키게 되면 여러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전 어학을 한 게 아니고 문학을 한 거거든요"라는 말인데, 실제로 많이들 모르는 사실이지만 영어학과 영문학은 하늘과 땅 차이다.
3학년 즈음되면 전공 강의실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못 보던 얼굴들이 늘어나는데 짓궂은 영문학 교수님들은 단박에 그 얼굴들에 질문을 한다. "공대생이 왜 여기와 있나?", "경영학만 하기도 바쁠 텐데 어떻게 영문과를 복수 전공할 생각을 한 거야?" 그들 대부분은 영어영문학이 인문학이자 동시에 어학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전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중 절반은 반학기 만에 자취를 감춘다. 영문학 수업은 대체로 영어라는 언어보다 영미 문화권을 살아온 작가의 글을 읽는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 몇 백 년 전 글 속에서 나를 찾는 과제가 나온다. 종종 리포트를 쓰며 작가가 되기도 하고, 책 속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신이 되었다가 미물이 되었다가, 슬라임처럼 자유자재로 본인을 바꿀 줄 아는 자만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맞이한 타인의 죽음에 황망히 추모시를 읽는 시간을 갖는다거나 교수님이 좋아하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대사를 읊어야 하는 건 덤이다. 그런 'P'스러운 수업에 길들여진 나에게 영어라는 언어는 미지의 세계였다.
그렇지만 학점을 위해 결국 어학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었다. 한 학년에 한, 두 개는 어학 수업을 들어야 학점이 채워졌다. 그리고 종종 문학이 나를 배신한 적도 있었는데 졸업할 때까지 유일하게 학점 포기를 하게 만든 수업도 문학이었던 걸 보면 그다지 내가 문학에 자신 있는 것도 아니었던 듯싶다. 어쨌든 문학에 비해 까다롭고 딱딱한 어학 시간은 가끔 생물 시간 같기도 하고, 수학 시간 같기도 한 지극히 이과적인 수업이 많았다. 혀를 뒤집어 까며 '대 모음 변이'를 익힐 때 특히 그랬다. 그런 내가 그나마 제일 좋아했던 어학 수업은 '영어 어휘 분석'이었다. 이 수업은 영단어의 어원을 알아보고 그 어원에서 파생된 단어들을 분석하는 말 그대로 '영어 해부학 시간'이었는데 어휘를 짚어 올라가다 보면 신기하고 재밌는 것들이 많았다. 담당 교수님은 머리가 살짝 벗겨졌으나 젊을 때 꽃 미모를 발산하셨을 것 같은 남자 교수님이셨는데 첫날부터 시답잖은 어휘 농담을 하셨기에 큰 기대가 없던 수업이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어원이라는 것은 매우 광활하여 왜 천문학자들이 새로운 별을 발견했을 때 덕후처럼 좋아하는지 이해가 갔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cosmos'라는 단어였는데 고등학교 때 공부깨나 한다는 친구들이 읽어봤다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꽃향기 나는 SF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게 한 수업이었다. cosmos라는 단어의 일단 질서, 정렬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그중 'cos-'는 외면(surface)을 의미하기도 하여 우주의 cosmos와 화장품의 cosmetic이 실은 같은 어원에서 왔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니 '우주'와 '화장'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무한하고 다채로운 세계 건만 그 세계에 실존하지 않는 이상은 절대 알 수 없는 본연의 존재들이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반짝거리는 무언가로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덮을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그때 즈음 나만의 유니버스인 얼굴 팍에 하이라이터라는 것을 처음 그어봤던 것 같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글을 쓰고 말을 할 때면 단어 하나하나를 여러 번 곱씹게 된다. 그건 내 애물단지 같은 전공이 준 유일한 보물. 이 작은 단어 하나에도 우주가 있다. 광활한 언어의 세계를 탐험하는 히치하이커는 오늘도 이름 모를 문장에 또 한 번 착륙을 시도한다.
2022.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