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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지 Jul 19. 2023

단발도 병인 양 하여

쓰는근육 18


오랜만에 머리를 기르고 있다. 간신히 거지존을 통과해 이제 날개뼈에서 찰랑댄다. 여전히 사람들 눈엔 중단발 그 이상 정도로 보이겠지만 내 딴엔 엄청난 인내의 결과물이다. 미용실을 갈 때마다 머리숱으로 매장 신기록을 매번 경신할 정도에 심한 곱슬이기에 솔직한 심정으론 빡빡 밀어버리고 싶지만 TPO를 맞추기 위해서라도 머리카락은 필요하다. 다만 나에게 잘 맞는 스타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해그리드처럼 불어나는 머리카락을 관리할 수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단 한 가지, 내 뒷자리 회사 막내의 찰랑거리는 웨이브를 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나도 언젠가 저 머리를 꼭 하고야 만다.


헤어스타일에 대해서라면 나는 할 말이 꽤 많다. 어릴 적 스스로 머리카락을 두 번인가 잘랐다. 한 번은 세 살 정도였으니 기억이 흐릿하지만 긴 머리를 망나니처럼 숭덩숭덩 잘랐고 그게 혼날 일이라 생각하긴 했는지 매번 들고 다니던 빨간색 애착 가방에 잔뜩 넣어 숨겼던 기억이 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그 가방을 처음 열어봤을 엄마 혹은 아빠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나의 기억에 신뢰가 없었는데, 그 시절 사진을 보면 제멋대로인 머리길이를 숨기기 위해 뽀글뽀글한 아줌마 파마를 하고 거기에 두건까지 쓰고 있는 내가 잔뜩이다. 그다음은 나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역시나 어느 날 충동적으로 머리카락을 잘랐는데 하필 그날이 초등학교 입학식 바로 전날이었기에 엄마는 나를 둘러업고 집 앞 미용실에 가서 어깨선 위로 매끈하게 떨어지는 단발을 만들었다. 그날 엄마가 울며 겨자 먹기로 사줬던 체크 리본에 키티가 달린 머리띠는 여전히 할머니 화장대 문갑 아래 잠들어있다. 그게 내 인생 첫 단발이었던가. 그래서인지 엄마는 내가 단발로 머리를 자른다고 할 때마다 치를 떨며 싫어했던 듯싶기도 하다. 왜 나는 내 머리카락을 잘라댔을까? 다 커버린 금쪽이지만 그래도 오은영 박사님께 묻고 싶다.  


본격적으로 단발을 디폴트값으로 갖기 시작한 때는 다 커서, 이십 대 중반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아침 루틴인 머리 감기 시간을 줄여보고 싶어 잘랐다. 그런데 의외로 반응도 너무 좋았던 것이다! 단발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세 명 이상에게 들으며 자연스레 단발의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한참 '단발병'이라는 신조어가 유행이었기에 나 역시 말기 환자처럼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잘라댔다. 단순히 사람들의 칭찬 때문에 잘랐던 건 아니다. 언제부턴가 새로운 일을 앞두고 미용실에 가 머리를 자르는 게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아니, 머리를 자름으로써 없던 새 마음도 먹게  층 없이 단정히 잘라 귀 끝에서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보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 옛날 성경 속 가장 힘이 셌던 삼손은 머리카락이 그 숙주였을지 몰라도 오늘날 나는 이 단백질 뭉텅이를 잘라 또 다른 힘을 길러내 온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머리를 다시 길러 보려는 것은 사실, 그런 나의 단칼에 잘라버리는 성향을 바꿔보려는 이유도 한몫한다. 나는 타인의 과정을 존경하고 중시하는 사람이지만 스스로에 대한 것은 생각보다 중간 없이 모든 걸 리셋해버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견딜 수 없어질 때까지 은근히 달구다가 결국 새까맣게 태워버린 냄비 따위를 들고, 깨끗이 얼룩을 지워 다시 써보겠다는 엄두를 내지 않은 채 남몰래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는 사람이 된다. 나 혼자 깨끗하고 단정해진 몸과 마음이면 무엇하랴. 그렇게 외면해 버린 어두운 면면과 찐득하게 혹은 딱딱하게 변해버린 여러 관계와 사건들은 사실 없어지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지난하게 남아있음을 최근 여실히 알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작은 것부터 인내해 보기로 했다. 고작 이것 하나로 무언가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거나, 내 성향이 요술처럼 변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내 인생의 부스스한 면도 품고 가보고자 하는 것이다. 애증 같은 이 머리카락부터 끈덕지게 길러보아야지. 또 새로운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해봐야 아는 거니까.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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