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근육 19
사회생활을 한 지 8년 차가 되었다. 한 아이가 태어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뒤집고, 기고, 서고, 걷고, 뛰고, 글을 떼고, 익히고, 말하고, 쓰고, 욕심도 부리고, 떼도 쓰고, 혼도 나고, 화도 내는 여러 진화과정을 겪고 자기 몸통 만한 책가방에 인생을 메고 교문을 통과하는 초딩이 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나는 찔끔찔끔 부족한 채 얼렁뚱땅 자라 직딩이 되었다. 뛰는 방법을 배웠지만 여전히 기는 게 편하며, 이메일을 쓰면서 0개 국어를 하고 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자리 욕심은 1도 없지만 칼퇴를 위해 떼를 쓰고, 백 번 혼이 나도 1도 할 줄 모르는 스스로에게 천 번 화를 낸다.
종종 내가 느끼는 '사회인'으로서의 나는 소시오패스 같고, 주변인 같고, 부적응자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직장인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데는 많은 귀인 덕분이다. 인간마다 타고나는 복이 있다던데 악력이 약한 나는 많은 복을 놓쳤을지 몰라도 '인복'하나만은 세게 쥐었다. 든든하고 멋진 선배는 무지 많았다. 그중 몇은 덜 떨어진 나를 있는 힘껏 끌어다 영재반에 앉혀놓는 극성맘 같기도 했다. 그때마다 집에 가는 길, 1인분도 못하는 내가 너무 큰 일을 맡은 것 같아 운 날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비슷한 또래의 비슷한 연차를 가진, 혹은 나보다 짧은 연차를 가진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외연승씨와 아마따씨도 그랬다.
외연승씨의 본명은 '이현승'이다. 3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 장례식장 방명록에 세로로 쓴 이름 석 자를 우리 큰아버지가 잘못 받아 적어 외연승이 되었다. 1월에 입사한 그녀는 2월부터 출근을 했는데, 입사 일주일 전 지하철역 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크게 다쳤기 때문이다. 내 맞은편에 앉을 예정이었기에 나는 1달간 파티션 너머 자리할 그녀의 모습을 이모저모로 상상했다. 마침내 2월에 출근했을 때에도 목발을 짚고 있었기에 내 상상보다 더 인상 깊은 첫인상이었다. 큰 키와 까무잡잡한 피부, 크고 동그란 눈이 이국의 미녀를 연상시켰는데, 우연히 훔쳐봤던 그녀의 인스타그램에서 알라딘에 나오는 쟈스민과 같은 의상을 입고 있었기에 그렇게 인식해 버린 것도 있었다(왜 그런 의상을 입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으나 까먹었다).
그녀가 이야기 한 나에 대한 첫인상은, 기억이 사실 잘 나지 않지만, 걷기 불편한 그녀를 위해 점심밥을 손수 퍼다 주었던 나의 성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점심 메이트가 된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지면서 퇴근 후 그녀의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연극이나 전시를 같이 보러 다니기도 했다. 또 어느 날엔가는 퇴근 후 훌쩍 광화문 한복판에 가서 아주 매운 낙지볶음을 먹고 힙한 을지로의 펍에서 사워 에일을 홀짝홀짝 마셨다. 그리곤 서로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서 꺄르륵 웃은 날이었다. 그녀는 비록 취업은 늦었지만 내 기준에 여러모로 앞서있던 사람이었다. 사랑도, 삶도, 취향도, 지혜도 모두 다 내가 갖고 싶어 하는 만큼을 그녀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러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지식인이었는데 음악, 음식, 와인 등에 특히 그랬다. 하지만 그것을 뽐내지 않았고 빈약한 나의 지식에도 항상 관심을 갖고 물어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매우 사려 깊었다. 최근 둘째를 임신한 그녀와 만났을 때, 집 앞 예쁜 푸딩가게가 생겼다며 커스터드푸딩 3개를 선물해 주었다. 하나는 내 것, 하나는 고령의 할머니 것, 하나는 엄마 것. 당뇨가 심한 우리 아빠 것은 뺐다며, 몰래 먹으라는 말을 덧붙였다. 외연승씨는 내가 친해진 사람 중, 가장 자신의 색깔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만큼 그녀는 타인의 바운더리를 존중해줄 줄 아는 참 어른이었다.
아마따씨는 두 번째 회사에서 만났는데 알고 보니 동문이었다. 1년의 경력을 쥐고 이직해 온 나보다 먼저 그 회사에 다니고 있었기에 나는 그녀에게 자주 질문했다. 공용 아이디를 물어보고, 비품 청구방법을 물어보고, 대표의 성깔과 근처 맛집 등 사사로운 걸 물어보다 친해졌다. 그녀는 원래 내 뒷자리, 다른 팀 소속이었지만 그 팀의 팀장이 퇴사하며 우리 팀 막내로 들어왔고 팀장님, 나 그리고 아마따씨로 구성된 '4팀'은 내 직장 생활 중 가장 격 없는 팀으로 기억된다. 아마따씨가 '아마따'로 불리게 된 에피소드도 이 팀에서 나왔는데, 팀장님이 이사한 새 집에 놀러 오라고 우리를 초대했으나 모두가 까먹은 상황에서 그녀의 '아 맞다' 한 마디가 하나의 밈이 된 것이었다. 그녀도 그게 퍽 마음에 들었는지 후에 본인의 자리 명패에도 그 문구를 넣었다. 아마따씨는 우리 셋 중 가장 어른스러웠다. 특히나 우리 중 사회생활의 기본 중 기본인 근태가 확실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 직원 중 가장 먼저 출근해 경비 해제를 하는 날도 꽤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참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대신 화가 나면 주먹으로 조용히 책상을 한번 쾅 내려치곤 했는데 그뿐이었다. 자신이 기분이 나쁘다고 타인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도 없었고, 주어진 일만큼은 깔끔하게 하고 이후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한 번은 비슷한 연차의 사람들끼리 모여 점심 후 티타임을 가질 때였다. 그날 누군가 억울함의 눈물을 흘린 날이었다. 그녀를 위로하다 서로 회사에서 운 적이 있는가에 대한 주제로 토크박스를 열었는데, 아마따씨의 말이 기억난다. "전 회사에서 절대 울지 않아요.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운 적 없어요. 대신 집에 가는 길, 택시 안에서 크게 울어요. 그게 제 철칙이에요." 나는 그 순간 그녀가 그 어떤 선배들보다 어른스럽다 느꼈다. 나도 잘 우는 편은 아니었지만 사소한 데서 터지는 일이 더러 있었다. 이를테면 아침 일찍 송부해야 하는 대기업 보도자료를 전날 일찌감치 예약 메일로 발송하고 퇴근했는데, 아침에 '진짜진짜레알최종최최종'본으로 발송하지 않았다고 클라이언트의 쿠사리를 먹은 날에도 그랬다. 그들이 말한 최종 수정본은 당일 새벽 4시에 작성되었다. 쓰다 보니 또 화가 나네. 아무튼 나는 그 클라이언트에게 직접 쓴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었고, 담당 차장님도 나를 크게 혼낸 게 아니었음에도 그간 쌓여있던 어려움과 버거움, 비루한 나 스스로에게 질려 엉엉 울어버렸다. 그때, 아마따씨는 어쭙잖게 날 위로하지도 않았다. 다만 점심시간에 하얗고 동그란 얼굴을 잔뜩 붉히며 조목조목 클라이언트의 부당함을 나 대신 토로해 줬다. 그리고 블루베리 스무디를 사줬다. 나보다 네 살인가 어렸지만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순간이었다. 지난했던 홍보업계를 떠나 그녀가 나라의 일꾼이 된 지도 2년 차가 되었다.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지만 그 모습도 꽤나 잘 어울린다. 그녀의 든든함을 나라도 인정해 준 셈이지.
인생 책을 꼽으라면 미치 앨봄의 <에디의 천국(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을 빼놓지 않는다. 놀이공원의 수리공이었던 에디는 갑작스레 죽어 천국에서 다섯 사람을 차례로 만난다. 이들을 통해 에디는 이토록 여러 사람이 자신의 삶을 일궈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로, 지극히 교훈적이지만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열댓 살 이후로 내가 천국에서 만날 다섯 사람에 대해 늘상 생각해보곤 한다. 영화보다 더 가짜 같은 잔인한 현실에서 하루하루 인류애는 빠르게 소멸하고 있다지만 막상 나를 이 냉혹한 사회 속에서 아직까지 살아 숨 쉴 수 있게 해주는 건 내 주변의 따뜻한 사람들 덕분이리라. 아마따씨와 함께 나를 엄마처럼 챙겨주던 오지씨, 인간 자기 효능감 그 자체인 칠년씨, 지금도 내 뒷자리에 앉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쩡이 팀장님과 나욤씨. 나도 그들의 천국에서 꼭 한 번 다시 만날 사람으로 기억되길 기도하며.
2023.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