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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지 Feb 05. 2023

퇴고를 하자

쓰는근육 9

고해성사를 하고자 한다. 나는 퇴고가 싫다. 십중팔구는 거의 퇴고 없이 글을 세상에 내보인다. 거의 ‘싸지르기’나 다름없다. 그래서 내 글은 그 옛날 돌려쓰는 교환일기, 싸이월드의 오픈 다이어리와 같은 성질을 갖는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퇴고가 없는 글은 글로서의 가치가 없다. 그냥 세상 한가운데 내지르는 고함보다 못한 자음과 모음의 구성체일 뿐이다. 지금 쓰는 이 글 역시도 퇴고 없이 발행해 버릴 확률이 부단히 높다.


사실 ‘퇴고推敲’란 단어는 밀 퇴, 두드릴 고자를 써 ‘미느냐, 두드리느냐’라고 해석된다. 이 단어는 당나라 시인이 쓰던 시구의 일부를 ’문을 밀다‘라고 하는 것이 나을지, ’문을 두드린다‘라고 하는 게 나을지 고민하는 데서 파생됐다고 한다. 지구 반대편에 나라를 팔아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작가 셰익스피어의 명문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떠오른다. 어쩌면 그 하나의 고민은 글쓴이에겐 죽고 사는 문제일 수도 있다.  


그리도 중요한 퇴고를 왜 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귀찮아서, 부끄러워서보다 ’아까워서‘가 가장 큰 이유였다. 어찌어찌 구성해 놓은 백 줄 안팎의 문장더미들을 깎아내고, 저며내고, 잘라내는 행위가 잔인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긴 고민으로 글을 해산하는 날보다 빛바랜 에피소드와 낡은 단어들을 잘 섞어놓았을 때 보기에도 먹기에도 좋은 한 입거리 디저트 같은 문장이 만들어지는 일이 많았다. 나는 그것이 재능이라 생각했으나 오 년 즈음 뒤에 보니 운이었고, 더 나아가 십 년이 넘으니 매끈한 비계 덩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천재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 휘갈긴 글들이 클래식이 되어 나의 노후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야 했다.


이런 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이유는 이제부터라도 회개하고 퇴고를 하려는 것이다. 글이란 살아 숨 쉬는 생명체 같아서 가치를 잃은 것들에서는 부패한 냄새가 난다. 아깝다고 버리지 않으면 글 전체를 썩힌다는 것을 그동안 몰랐다. 이십 대 초반 소설 수업에 제출했던 단편 소설을 다시 읽는 내내 철 없이 대단한 듯 오만하게 적어 내려 갔던 글자들에 미안해졌다. 그때 교수님이 강의 시간 언급하셨던 어떤 작가의 퇴고법이 생각난다. 그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간 다음, 모든 문장을 지워버린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이 쓴 글에서 기억나는 문장만 다시 적는다고. 그 외 기억이 나지 않는 문장들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어차피 그런 문장들은 명문이 아니니까.


퇴고를 하자. 돌아보고 씹어보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자. 고민을 하기보다 고뇌를 하자. 도려내고 깎아내다 보면 담백한 문장들이 남겠지.


20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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