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근육 14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못 마시는 편도 아니다. 어쩌면 굳이 따지자면 잘 마시는 편이다. 주량으로나, 빈도로나 '잘'하는 쪽. 그러니까 취미는 아니지만 특기는 된다. 여느 특기가 그렇듯 쉽사리 이 역시도 자랑하기엔 좀 그렇다. 그리고 잘한다고 스스로가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고. 물론 잘한다고 좋아지는 것도 아니니까.
한 번도 취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주망태가 되진 않는다. 이십 대 초반 주사는 자는 것이라고 할 만큼, 어느 정도 내가 취한 시점을 알던 시기가 분명 있었다. 그러나 삼십 대 초반 이후로는 필름도 종종 끊긴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나도 남도 그걸 모른다는 것. 조금 예민한 사람들만이 나의 취함을 어렴풋이 인지한다. 술을 마실수록 얼굴은 더 하얘지고 발음은 더 정확해진다. 다만 종종 중심을 잃고 넘어지거나 물건을 자꾸 떨어뜨린다고 한다. 이 역시도 함께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신 타인에게 들은 나의 모습.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이 요즘엔 종종 소름이 끼쳐 몸을 사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필름이 끊겨도 정확한 사람임을 알고 나서 더욱 무섭다. 친구가 선물로 준 도지마롤을 냉장고에 차분히 넣어두고, 콘택트 렌즈를 세척하고, '집에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낸 기억이 정작 나의 기억 속엔 없을 때.
그래서 자주 마시진 않는다. 적게는 두어 달에 한 번, 조금 잦게는 일주일에 한 번이 다다. 그런데 사실 고백하자면 최근에는 그 빈도수가 많이 늘었다. 혼술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주 고요한 성당에서 책상 위 작은 문을 살짝 열고 고백한다. '제가 요즘 꽤나 많이 술을 마셨어요. 좋아하지 않는다곤 했지만 재능을 썩히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싶어서...'
지독하게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에서 평생을 살며 술병이 집 안에서 나오는 것은 거의 성령훼방죄나 다름없다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그 시기 모순적이게도 아빠는 거의 매일 술독에 빠졌다 기어 나온 사람처럼 술 냄새를 풍기며 새벽에 들어왔다. 술이 싫었고 미웠고 안도했고 슬펐다. 왜 그렇게까지 마시는 걸까?라는 질문은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됐다. 그렇게 마시면, 어떤 것들은 아무런 무게를 갖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루 종일 나를 짓누르던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자는 척을 하면서 더듬거리듯 느꼈던 안도감의 실체를 알게 됐다. 그 이후부터는 술이 어렵지 않았다. 유난히 지치는 날엔 집 앞 편의점에서 고민 없이 맥주를 산다(가끔 소주와 맥주를 사기도 한다. 아직 와인은 사보지 않았다). 아직 우리 집엔 80세가 넘은 고령의 권사님이 계시기에 4개 만원 행사는 남의 나라 이야기다. 오늘 밤 자기만의 방에서 몰래 해치울 정도의 양을 사고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담아 퇴근한다. 그리고 봉지에 꽁꽁 싸매 다음날 아침 들고 나와 해결한다. 우리 집 권사님은 모르시겠지만 하나님은 아시겠지. 그 묘한 죄책감은 술이 깨는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덤덤히 받아들인다.
술을 마시며 뱉는 말들도 딱 그 정도의 무게감. 어떤 때는 알코올보다 더 빨리 휘발된다. 오히려 너무 빨리 공중에서 흩어질까 봐 평소 하지도 못했던 진지한 말들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웬만하면 나보다 술을 잘 못 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들의 혀는 이미 꼬여 내 말에 제대로 된 대꾸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더 많다. 그래서 나의 말들은 취중 농담에 그친다. 그리고 그렇기에 나는 그런 주담(酒談)이 좋다. 과한 근심도 술상 앞에선 그저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주 커다란 비밀을 토해도 편안하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거대한 진담을 자잘 자잘한 농담으로 덮고 나면 그만인 시간이 고맙다.
요즘엔 혼술을 하면서 종종 글을 쓴다. 치부책에 쓰기도 하고, 아주 공개적인 아고라에 쓰기도 한다. 지금처럼. 남이 볼 때 아무렇지 않은 지극히 가벼운 글자 속에 묵직한 비밀들을 하나하나 숨겨둔다. 종종 깨어나 나도 알아보지 못할 비밀들을 털어둔다. 부디 농담으로 읽히길 바라며.
202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