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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지 Apr 17. 2023

산책 찬가

쓰는근육 13


산책의 계절이다. 아니다, 정정한다. 사실 산책의 계절은 따로 없다. 사시사철 산책을 해야 할 이유는 있다. 봄엔 꽃 보러, 여름엔 초록을 보러, 가을엔 낙엽 보러, 겨울엔 바람을 보러 산책을 간다.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는 내게 '걸을 수 있음'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산책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어린 나뭇가지를 서로 기대놓은 것 같은 글자. 동그라미 같은 유연함은 없어도 글자 속에서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단어. 나는 산책을 좋아한다. 


봄의 산책이 유독 좋은 이유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산책이 좋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굳이 산책을 나가야 하는 명분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계절. 창 밖에 드리운 초록, 선선한 바람, 온도, 습도, 분위기 모든 것이 발길을 이끈다. 이런 날에는 적게 먹고 많이 걸어야 한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가벼운 겉옷을 걸치고 나간다. '디저트 배'를 케이크, 과자, 커피 대신 자연으로 든든히 채울 수 있으니 아쉬움도 없다.


5년 넘게 한 회사를 다니며 업무 스킬보다 산책 코스를 더 견고히 축적해 왔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누군가 근속의 비법에 대해 궁금해한다면 분명 그렇게 답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고. 걷다 보면 무언가 가벼워진다. 살 덩어리 육체뿐만 아니라 머릿속도, 마음속도 어쩐지 감량하는 기분이다. 단단한 땅을 자박자박 밟으며 걱정과 근심이 덕지덕지 붙은 나를 감당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귓가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바람이 식혀줄 만큼만 땀을 쪼록 흘리고 나면 뭔가 또 남은 시간을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물론 그 용기는 땀만큼이나 빠르게 휘발되긴 하지만. 


오늘 새로운 산책로를 발견했다. 높은 건물들 때문에 미처 몰랐던 육교 건너편 작은 공원. 평평한 공원인 줄 알았는데 얕은 동산이었다. 나름 3개의 쉼터, 2개의 마당을 가진 야트막한 공원을 걸어 올라가며 흙으로 된 지면이 일으키는 작은 모래 먼지와 산책로를 잇는 계단 사이사이 피어난 들꽃 덕분에 고개를 떨구고 걸으면서도 힘이 났다. 걷는 내내 조우하는 '이름 모를 것들'이 늘 반갑다. 이름 모를 나무, 들꽃, 풀, 벌레, 새.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있는 힘껏 피어나고 살아간다. 어떤 무언가로 불리고, 그것으로 규정되는 인간의 생이 부질없어지는 순간. 헥헥 대며 걸어 올라 도달한 팔각정(이라 이름 붙였지만 사실 사각정인)에서 잠시 눈을 감고 그곳의 존재들과 같은 처지가 되어본다. 역시, 산책은 필요해. 


p.s. 귀한 산책로를 소개해 준 팀장님께 감사를




2023.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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