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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지 May 22. 2023

엄마의 사랑 방식

쓰는근육 15


어느 날 TV에 한 남자 연예인이 나왔다. "요즘 쟤가 그렇게 웃기더라." 그는 코미디언이 아니었으나 엄마 기준 최고의 칭찬이었다. 엄마는 남들이 재밌다는 것에는 웃음이 박했으나, 본인의 유머코드와 맞을 땐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리며 깔깔 웃곤 했다. 사실 그는 모델 출신 예능인으로 최근 예능뿐 아니라 유튜브 콘텐츠에도 자주 등장하는, 꽤나 보편적으로 인기를 얻는 사람이었으니 굳이 엄마의 웃음 포인트가 독특하다고 하기도 뭐 했다. 그렇지만 그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크리에이터 방송에 나오는 사람이었기에 엄마가 그를 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신선했던 것이다. 내가 너무 엄마를 또 구닥다리 취급한 것 같아 조금 미안했다.  


"지난번에 저 사람이 어디 나와서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자기는 완전 사고방식이 딱딱하다는 거야. 그래서 자기의 말에 사람들이 상처받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자기랑 같은 사고방식의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대? 그 말에 완전 공감했잖아." 그것은 MBTI 이야기였다. 그의 MBTI는 온 국민이 알고 있었다. 트위터 짤로도 유명한 그는 극 사고형(T)으로 박명수의 유튜브에서 도플갱어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가 방송에 나오면 사람들은 대부분 MBTI 이야기를 이어갔고, 그때마다 그는 그런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고 했으나 점점 과몰입하여 '나는 무조건 T인 여자를 만날 것이다'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우리 엄마도 어디선가 그의 출현을 마주했고 이와 같은 이야길 들은 것이다. 나는 웃으며 그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그런데 나는 생각했어, '아, 우리 딸 하고는 정 반대인데', '우리 딸이 저런 남자 만나면 상처받겠다.'" 그 이후 엄마에게서 튀어나온 문장은 뜻밖이었다. 나는 엄마를 물끄러미 쳐다봤고 엄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TV를 보고 있었다.


이따금씩 나는 그 별것 아닌 무난한 문장을 되새긴다. 어제 혼자 TV를 보다가도 문득 그 문장을 곱씹었다. 나에게 그 문장은 마치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처럼 엄마의 사랑 방식을 완벽하진 않지만 띄엄띄엄 이해할 수 있게 한 첫걸음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이해한 그녀의 사랑 방식은 이렇다.


네가 완벽하게 행복했으면, 빈틈없이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깊이 우러난 사골국 같은 그 마음은 종종 엄마의 말을 귀찮아하고, 건성으로 대답하고 난 하루의 끝에 끼얹어져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곤 했다. 뽀얗고 말간,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끓고 있던 마음.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더 깊어지면 깊어졌지 가벼워지진 않을 그 마음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됐다.


나는 한 때 우리 엄마가 구미호는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 예상했겠지만 난 극 N이자 극 F이다) 엄마는 늘 예뻤고, 하얗고, 머리가 길었다. 뽀글 파마를 한 아줌마들 사이에서 포니테일을 한 엄마는 누구보다 젊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 조차도 자주 볼 수 없었다. 늘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엄마 대신 나의 양육자는 할아버지, 할머니였고 모든 학교 행사에 보통의 아줌마들보다 훨씬 늙은 할머니가 와 있었다. 그게 부끄러운 적은 정말 단 한 번도 없었고, 그건 그것대로 나에게 행복이었으나 종종 엄마의 사랑에 대해 의심한 적은 많았던 철없는 딸이었다. 그래도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며 엄마에 대해선 완전히 이해했다고 자신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가 나를 낳았던 그 나이보다도 몇 살이나 더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요즘 <썬데이 파더스 클럽>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5명의 아빠가 매주 일요일마다 뉴스레터 형식으로 보내주는 육아일기를 한데 모아 엮은 책이다. 그중 한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과연 내가 한 생명을 내 마음대로 시작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아이 낳기를 고민했다고.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난 지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대신에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이 생명을 소중히 키워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숙제를 마주하게 됐다고 말이다. 이 문장을 밑줄 치며 읽으며 나는 엄마의 사랑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의 유머 방식에 비하면 아주 지극히 평범하고, 보편적인 그 방식 덕분에 나는 스스로 충분히 행복하고 사랑받을만한 존재라 자부할 수 있게 됐다.



202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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