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칼과 얼1>
신은 맑고 슬기로운 것을 위해 칼을 가지고 있다. 참다운 신은 꼭 켜져야 하는 곳에 불씨를 던지며, 아편은 꼭 필요한 양만을 진통에 사용한다. 인간의 신념이 질(質)이고 아편이 양(量)이라면 신은 질량 보존의 법칙과 같이 질과 양을 다스린다. 반면 사람이 우상화 시킨 신은 인류를 자기 도피에 빠지게 만든다. 또한 참다운 신은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는 반면 사람의 신은 인간 사회를 파괴하며 자기를 드러내려 한다.
그렇다면 신이 던지는 칼은 과연 무엇인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로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칼은 신이 인간 세상을 향해 던져지는 것이다. 신의 칼은 도마 위의 음식을 장만하는 어머니의 칼로 인간을 위해 쓰여진 것이다. 참다운 신은 꼭 켜져야 하는 곳에 불씨를 던져 내일을 밝힌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익, 부귀영화에 치우쳐서 소수의 지배자들이 갖는 이치에 집중하며 현재만을 밝힌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대중의 질서를 만들어 내려 했고 그렇게 역사에는 위기와 파탄이 거듭 반복되어왔다.
신이 부여한 칼로 우리가 싸우게 되는 상황은, 곧 영원한 진리의 고귀성을 증명한다. 싸움은 영원한 진리를 찾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잠깐의 현재가 행복하다 하더라도 60억 그의 50배에 해당하는 인류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다. 어떤 시대나 사회가 잠시 안정적이게 되더라도 진리를 에워싼 형태가 아니라면 결국은 다시 위기와 파탄을 반복할 것이다. 다만 변동해야하는 건 ‘가치’다. 가치의 변동은 곧 영원한 진리에 접근해가는 변천과정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자전하듯 영원히 변치않는 진리를 에워싸고 가치는 '얼'을 중심으로 시시각각 변동해야한다.
‘얼’은 ‘직감(直感)에 잡히는 수많은 것들과 더불어 명멸(明滅)하는 무수한 것들 사이로 영원한 것을 꿰뚫어 가는 것’이다. 직감을 갖고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명멸하는 세상 사이에서 영원한 진리를 향해가는 것이다. 이는 얼의 동태적 의미다. 시공간의 의미를 초월한 가치의 발전, 변동 과정인 것이다. 동시에, 정태적으로는 직감이 향하는 중심이자 본능 이기도 하다. 로고스에 종속적인 존재로 시공간을 초월한 영,육,혼의 ‘본질’인 것이다. 이러한 얼을 신, 인간, 우리의 얼로 2가지로 나누어 이해해 볼 수 있다. 우선 [신의 얼]은 로고스로, 사람을 조화롭게 성장시킨다. 특히 이는 그 나라 정통의 ‘진(眞)’에 입각할 때 국가의 정신과 경제를 조화롭게 성장시킬 수 있다. 즉 순환하는 우주와 생명이 엮은 질서인 것이다. 두번째로, [인간의 얼]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진리를 지향하는 성격을 가지며 신의 얼에의 상태를 짐작한다. 예컨데, 백색의 색이 여러 색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신에 대해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신과 얼 사이에서 생활하며 항상 본질적 문제를 마음에 품고있다. ‘본질’이 향하는 이끌림은 곧 얼의 운동이다. 이는 외연과 상호작용 하며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 이런 행동이 바탕이 되어 인류의 역사가 흘러왔다. 하지만 그간 넓고 깊고 영원한 것을 찾기 위한 노력보다는 자신만의 허영과 오만을 드러내고자 하며 많은 위기를 자초했다. 즉, ‘자가 도취를 연속해 온 탁상적 사유’를 해왔던 것이다. 탁상적 사유는 진심을 왜곡하고 은폐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자아도취에 빠져서 물질만, 지식만을 개발시켜왔다.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며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지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다운 바탕’을 길러야 한다. ‘RE:얼’, 다시 얼로 돌아가 본질의 텍스트를 재발견하고 한국문화에 생기를 부여해야한다. 그릇된 것 속에서도 사람의 천심에 따라 자기의 ‘얼’을 굳힘으로써 참다운 신앙과 더불어 문화와 경제가 자리잡기 때문이다. 신과 칼과 얼은 ‘인간과 신이 개입된 전체의 무게중심’이다. 중심에서 벗어났을 때 쓰라린 칼로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렇게 얼을 발견, 재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흐뭇하고 넉넉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내용 출처 : 신과 칼과 얼 1 (원당 이득희 저/즈네상스팀 편, 20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