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가겸

1월, 명심의 글

그렇게 명심하게 될 때

by 이가겸

새로운 해가 떴다. 특별하지 않은 계획과 다짐을 세우면서 다시 1월을 시작했다.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다시 책을 깊게 읽는 시간이 길어졌다. 거기에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고 그간 썼던 글도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배움과 시간 속에서 더욱더 느껴지는 공허함이 나를 힘들게 했다. 다짐했던 많은 가치가 크게 무너졌다. 계속 써오던 12월, 성찰의 글도 적을 수 없었다. 남에게 보이는 글을 쓴다는 이유 때문일까, 내 안에 확신이 없어서일까?


정신없이 매일을 살다가 글쓰기 과제가 끝남과 동시에 드디어 오늘 나에게 정적이 찾아왔다. 다시금 올라오는 이유 없는 우울과 괴로움에 다시 <정적>을 읽게 되었다. 그렇게 페이지를 넘기던 중, 모차르트의 말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비난에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내 감성에 충실할 뿐이다.

- 모차르트


읽고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을 정리하자면 2가지다. 내가 타인의 틀에 다시 갇혀있었다는 사실과 나의 감성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다. 아마 난 내 감성이 예민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예민을 뜻하는 영단어 'Sensitivity'는 감수성(感受性)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감수성은 자극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능력, 감성이자, 한 개 이상의 감각들을 인지하는 성질이기도 하다. 이 예민함은 나를 눈치 보게 만든다. 나에게 감정이 안정되지 못하고 요동치기 쉬우니 스스로 소외되어야 한다며 세상을 회피하게 만든다. 아마 불균형을 보면 있는 그대로의 불균형을 받아들이기보다, 균형을 맞추고 싶어 하는 사람의 본능 때문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어떤 생각을 하든 결론은 언제나 내 탓이었다. 예민함을 회피할 뿐 충실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나는 다시 주체를 잃게 되고 흐르는 시간 속에서 외형만 집중하게 되었다.


'나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고양시키기 위해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을 학습하느라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선구자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 입력된 내용을 풀어내는 수동적인 인간, 즉 로봇이 되어간다. p39'


난 나의 감성이 사회의 가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타인에 의한 평가는 갇힌 기준을 만들어내게 된다. 나중에는 타인의 평가를 예측해보면서 존재하지 않는 기준을 만들어 내게 들이댄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인생의 주가 되지 못한다. 놀랍게도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책, SNS 또 힐링을 테마로 한 예능 프로그램이나 토크쇼 등에서 언제나 '인생의 주인은 당신입니다'를 말하고 있다. 거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마음이 무너진다. 여기서 자괴감이 또 찾아온다. 이 자괴감은 일상을 방해하고 수동적인 로봇으로 삶을 살아가게 한다.


하지만 나 스스로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고개를 끄덕였고, 무너졌으니 내가 나의 힘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명심은 배움의 핵심, 배움은 자신의 머리가 아니라 심장에 그 내용을 새기는 작업이다. 곧 내가 삶의 주체라는 것을 심장에 새기는 과정이다. 13세기 페르시아 수피 시인 잘랄 앗딘 루미는 이렇게 말한다. '우주는 당신의 밖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의 안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들이 이미 그 안에 있습니다.'. 난 이제 1월, 타인과 그 기준에 부딪쳐야 한다. 예민함을 받아들이기 위해 또 주체로써 하루를 완성해나가기 위해 회피가 아니라 당당하게 쳐다봐야 한다. 그렇게 명심하게 될 때 진정 나는 나로 살아가는 주체로 매일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내용 참고 : <나를 변화시키는 조용한 기적, 정적> 배철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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