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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겸 May 01. 2021

피로 사회

한병철(2010) "그는 자아 속에서 익사한다"

* 독서하며 인상 깊었던 책의 구절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 


활동적 삶   

극단적으로 덧없는 것은 인간 삶 만이 아니다. 세계 자체도 그러하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편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존재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41


후기 근대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 주고 지속에 감정을 불러 이렇게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 되었으며 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 다해서 사는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 노동 자체가 적나라한 활동이다. 41-42


호모 사케르

후기 근대의 성과 사회가 우리 모두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켜 버린다면 (...)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호모 사케르인 셈이다 43


과잉 활동, 노동과 생산에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지는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 노동 사회 성과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43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 사회를 낳는다. 이러한 강제 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 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집에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우울증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에 무젤만과 유사한 증상을 나타낸다. 44


보는 법의 교육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47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기르기 위한 최초의 예비 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에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47-48


사색적 삶 (...)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 시선을 (...)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 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 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48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49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 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도 잊어 가고 있다. (...)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과 구별된다. 오늘날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만남은 강렬한 (..)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 버린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 많이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  50


공포가 특정한 대상의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50


사회 긍정성이 증가하면서 불안이나 슬픔처럼 부정성의 바탕을 둔 감정 즉 부정적 감정도 약화된다. (...) 사유 자체가 “항체와 자연적 면역성으로 이루어진 그물”이라면, 부정성에 부재는 사유를 계산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51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과 사회도 자폐적 성과 기계로 변신한다. (...)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 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 주는 것이다. 52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힘은 단순한 무력함, 무언가를 할 능력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무력함은 단순히 긍정적인 힘의 대립항일 뿐이다. 무력함은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결국 그 무언가에 대한 종속이며 그 점에서 긍정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부정적 힘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이런 긍정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 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 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 Nachdenken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 나가기 Fortdenken 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53


 역설적이게도 활동 관련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 행위로써 어떤 자유로운 행동은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김에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54

 

피로 사회

- 피로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 모리스 블랑쇼   


활동 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 사회로 발전해간다. 그 와중에 "브레인 도핑"처럼 부정적인 표현은 "신경 향상 neuro-enhancement"으로 대체된다. 도핑은 말하자 면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65


성과 사회, 활동 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의 (...)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형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66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 적인 그것은 한트케가 「피로에 대한 시론」 3에서 "분열 한 피로다. 피로"라고 부른 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오직 자아만 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 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피로는, 본래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아무 말 없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았다. 아마 도 이러한 폭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직 타자를 일 그러뜨 리는 시선 속에서뿐이었을 것이다."67


근본적인 피로 (68) 그것은 영감을 준다. (...) 오히려 피로 속에서 특별한 시각이 깨어난다. 69


깊은 피로는 정체성에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 이러한 피로는 깊은 우애를 낳고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70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 Zwischenzeit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 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 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72


우울 사회   

성과 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 있다. 81


반면 카프카는 치유적인 피로, 상처를 아물게 하는 피로를 상상한다. "신들은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으며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 나의 책「피로사회」도 치유적 피로에 대한 이야기로 끝난다. 치유적 피로는 자아가 스스로에게 곤욕을 당하는 자아 피로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 자아 피로는 자아의 잉여와 반복에서 비롯되는 피로다. 


하지만 치유적 피로는 이 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한 피로 속에서 자아는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긴다. 그것은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 으로서의 피로, 건강하고 "세상을 신뢰하는 피로"이다. 반면 자아 피로는 고독한 피로, 세계가 없는, 세계가 부족한, 세계를 지워버 리는, 개개인을 고립시키는 피로이며,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 계의 대가로 타자와의 모든 관계를 파괴해버리는 피로다. 82


할 수 있다 사회, 자유로움을 자처하는 성과 사회   

프로이트의 심리 장치에서는 부인 Verneinung과 심적 억압 Verdrangung, 위반에 대한 불안이 지배적이다. 자아는 "불안의 장소"이다.' 하지만 후기 근대의 성과 주체는 부인할 일이 거의 없다. 그는 긍정의 주체다. 83 = 포스트 프로이트적 자아


후기 근대의 성과 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복종, 법, 의무 자유, 쾌락, 선호가 그의 원칙이다. 그가 노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 (...) 그의 노동은 향유적 노동이다. 그는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인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명령하는 타자의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해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유에서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새로운 강제가 발생한다는 데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타자로부터의 자유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전도되며, 이는 오늘날 성과 주체가 겪는 많은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 된다. 타자와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보상의 위기가 찾아온다. 인 정으로서의 보상은 타자 또는 제삼자라는 심급을 전제한다. 스스로를 보상하거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보상 구조에 이상이 생기면서 성과 주체는 점점 더 많은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다. 86-87


세네트 나르시시즘


세네트. Richard Sennett 역시 보상의 온 원인으로 나르시시즘적 장애와 타자 관계의 결핍을 들고 있다. 장 위기가 "성격 애로서의 나르시시즘은 뚜렷한 자기애와 완벽하게 대립된다. 자아 속으로의 침잠은 보상을 낳지 못하고, 오히려 자아에게 고통을 가한다. 나르시시즘에서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가 소멸하는데, 이는 자아가 결코 뭔가 새로운 것, 다른 것'과 마주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것은 삼켜지고 자 아가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을 때까지 변형된 다. 하지만 이로써 타자는 무의미해지고 만다. [·····] 나르시시스트는 경험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체험하고자 한다. 마주치는 모든 것 속에서 자기 자신을 체험하려는 덧이다. [.....] 그는 자아 속에서 익사한다.


경험하는 인간


경험하는 인간은 타자와 마주한다. 경험은 이화적이다. (...) 자아는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정립한다. 이로써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는 경계선이 유지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타자와의 자기 대립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반면 나르시시즘에서는 타자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나르시시즘적 장애를 겪는 사람 은 자기 자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타자 관계가 소실되고 이에 따라 안정된 자아의 이미지도 형성되지 못한다. 89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나르시스적 주체는 완결에 이르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완결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를 잃고 열려 있는 공간 속에 흩어져버린다. 완결된 형식의 부재는 무엇보다 경제적 조건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채방성과 미완결성은 성장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90


히스테리 환자는 특징적 형태를 보여준다. 따라서 히스테리는 우울증과 달리 형태학적 접근을 허용한다. (...) 우울증 환자는 무형적이다. 그는 성격없는 인간이다. (...) 진정한 친구가 단 한 명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슈미트에 따르면 무성격과 무형태의 신호인 것이다. 슈미트가 살아 있다면 페이스북의 수많은 친구들은 그에게 후기근대적 자아가 성격 없고 무형적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로 여겨질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아준다면 성격 없는 인간이란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고 어떤 역할이나 기능도 수행할 수 있는 유연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무형 성 내지 유연성은 높은 경제적 효율을 가능하게 한다. 90-91


프로이트가 강조하는 것처럼 무의식과 섬적 억압은 "매우 커다란 상관성"을 지닌다. 하지만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와 같은 오늘날의 정신 질환은 억압이나 부인의 과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즉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한 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 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정신 분석학으로 이런 병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증은 초자아와 같은 지배기관에서 오는 억압Repression의 결과가 아니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억압된 심리적 내용을 간접적으 로 암시해줄 프로이트적 "전이"도 일어나지 않는다. 92


우울증에는 무의식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 우울증에는 아예 타자의 차원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94



소진, 과도한 긴장, 과부화, 자기 자신에 의한 소모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 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 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간다. 95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더욱 줄여놓는다. 가상공간에서는 타자성과 타자의 저항성이 부족해진다. 가상공간에서 자아는 사실상 "현실원리" 없이, 다시 말해 타자의 원리와 저항의 원리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가상현실 속의 상상적 공간에서 나르시스적 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다. 실재가 무엇 우리의 의미에서 우리를 더 그러한 실재를 가상화와 디지털보다도 그 저항성을 통해 존재감을 가진다면, 털화의 과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지워나간 다. 실재는 두 가지 붙잡는다. 즉 일을 중단시키고 저항하여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라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서 우리를 잡아주는 것이다. 95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린다. 슬픔은 대상과의 강력한 리비도적 유대관계게서 나오며 무엇보다 그 점에서 우울증과 구별된다. (...) 즉 부재하는 자와 부정적 관계가 멜랑콜리의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은 모든 관계와 유대에서 잘려나간 상태이다. 우울증은 아무런 중력도 없다. p96


소셜 네트워크 속 “친구들”은 마치 상품처럼 전시된 자아에게 주의를 선사함으로써 자아 감정을 높여주는 소비자의 구실을 할 따름이다. 96


“멜랑콜리가 비범한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었다면 우울증은 비범한 것이 대중화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울증은 “멜랑콜리에 평등을 더한 것이며, 민주적 인간의 전형적 질병이다.” 그러나 에렝배르는 다른 한편으로 우울증을 니체가 예고했다는 주권적 인간의 도래가 대규모로 실현된 시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우울증 환자는 “자신의 자주성에 지쳐버린” 사람, 즉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될 힘을 상실한 사람이다. 그는 “주도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의 끝없는 반복에 지쳐있는 것이다. 97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 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103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 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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