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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겸 Oct 24. 2021

업사이드다운 해파리

2101024

 


 어제는 일산의 한화 아쿠아리움에 다녀왔다. 어린 친구들도 참 많았고, 해양생물도 참 많았다. 놀이공원 테마파크에 온 것 마냥 설레는 기분으로 관람을 했다.

놀랍고도 장엄한 수중 세계를 구경하면서 감탄하던 사이 내 눈에 띄었던 생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업사이드 다운 해파리 (Upside Down Jelly)"였다. 이 생물 은평 생을 거꾸로 뒤집힌 채 살아가서 이름이 upside down이라고 한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 저렇게 거꾸로 평생 사는 해파리도 있는데. 남들과 좀 다르게 산다고 뭐 어떤가"라고.




가끔 우리는 타인의 말 한마디에 불행해진다. 스스로 아등바등 버텨보며 만들어낸 나만의 기준인데, 그걸 타인은 너무나 쉽게 잣대를 들이밀며 판단한다. 가끔 그런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재판장에 선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 고민을 주위에 하면 "신경 안 쓰면 되지"라고들 조언을 해준다. 하지만 그 타인의 의견이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나는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하려고 다짐한다. '타인의 의견이 신경 쓰일 때, 상처 받지 않기 위한 나만의 방법'을 찾는 거다.



내가 그 사소한 참견의 말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때, 어떤 행위 또는 생각을 하면 저 말들을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치워버릴 수 있을까? 만 정립해 나가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살아온 방식과 기준에 대한 왈가왈부를 들으면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다. (물론 어떤 성격이나 특성상 정말 신경 안 쓰이는 그런 축복받은 분도 계실 수는 있겠다) 마침 내가 어제 읽던 소소하고 간결한 에세이가 있는데, 타인과의 거리두기에 대한 내용이었다.


우리는 외부 의견에 따르게 될 때가 많다. 대답이란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나와 세상의 대답이 다른 이유는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이지 정답이 틀려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외부 의견에 일일이 상처 받을 필요가 없다.
(...)
그런 부조리한 평가에 시달리지 않겠다고 작정하는 마음이야말로 성숙한 인격의 증명이다. 자기 속에 인간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식이 명확하게 확립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자는 무조건 넓은 집에 살아야 된다거나, 직함이 높아야만 성공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받게 된다. 여기에는 이해도, 소통도 없다. 106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조금 다를 수 있다. 아니, 매우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도, 나도 누구의 삶의 방식이 평생 거꾸로 뒤집힌 채 살아가는 것이라 한들, 그에 잣대질 할 권리는 없다.


 난 자신감을 얻기보다, 만든다는 표현을 좋아하는데 후자가 더 쟁취로서의 느낌이 든다. 누군가는 지금 열심히 자신만의 자신감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그 속도도 제각기 다를 것이며, 방향 또한 보는 방향이 같을 수는 있어도 가는 길은 모두 다를 것이다. 서로가 해야 할 일은 그 사람 자체의 삶에 대한 인정이다. 어떤 타인에게 말해본다. 공감은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거꾸로 살든 바로 살든, 인정도 어렵다 싶으면 침묵할 때와 말할 때를 구분하고 삶의 방식에 왈가불가하지 말아 달라. 우리 모두 숨은 쉬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다른 사람의 살아가는 방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이 나만의 방식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는 나의 삶이 누구보다 올바르다는 신념과는 다르다. 자기 자신에게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져야 된다는 말도 아니다. 현재와 같은 모습이 최소한이라는 당당함이다.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부유한 사람을 미워할 이유가 없고, 내가 부유하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불편하게 여겨서도 안 된다. 살아가는 모습은 제각각이다. 삶에는 기준도, 법칙도 없다. 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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