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나이 딱 마흔에 초등 교사직을 그만두었습니다. 서울 공립초등학교에서 15년 동안 교사로 지냈거든요. "초등 교사가 여자 직업으로는 최고"라는 말을 자주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른 퇴근(보통 8:30 출근, 4:30 퇴근), 육아 휴직, 방학, 연금이 그 이유라고들 하지요. 그래서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많이들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한 번도 초등 교사를 꿈꾼 적이 없었습니다. 서울교대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어요. 실기를 보지 않는 미술교육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가을에 시작했다가 포기한 미술에 대한 미련이 늘 있었거든요. 미술교육과에 가면 못다 한 꿈을 펼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교대의 미술교육과는 제가 생각하는 미술을 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초등 교과목 중 하나인 미술 관련 강의를 다른 과보다 조금 더 수강하는 정도였어요.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시골에 있는 기숙 고등학교였는데, 분위기가 아주 자유로웠습니다. 봄에는 3일 동안 수업을 멈추고 문예 대회와 스포츠 경기를 하는 예술제가 열렸고, 가을에는 합창제와 연극제를 했어요. 이 모든 행사를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진행했지요. 첫눈이 오면 전교생이 수업을 멈추고 뒷산으로 올라가 토끼를 잡던 기억도 납니다. 이런 경험들이 십 대의 풍부한 감수성과 만나 평생 간직하고 싶은 보물로 남아있어요. 그래서 대학에 가면 고등학교 때보다 더 신나고 넓은 세상이 펼쳐질 거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교대의 분위기는 기대와 많이 달랐어요. 학교는 정문에서 후문까지 10분이면 닿을 만큼 작았고, 같은 과 동기 30명과 거의 모든 수업을 함께 들어야 했습니다. 남학생은 단 3명뿐이었어요. 시간표도 선택 과목 몇 개를 제외하면 대부분 정해져 나왔고,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강의도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교대를 다닐 때는 IMF 직후라 종합대학에서 교대로 편입 오는 경우 많았어요. 연세대를 졸업하고 기자로 일하던 언니도 우리 과로 편입했는데, 친해진 뒤 그 언니가 제게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너는 교대보다 종합대학을 다니면 더 날개를 펼칠 것 같아."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히더라고요. 종합대에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자주 했지만, 결국 생각에만 머물렀습니다. 4년 내내 그만두고 종합대학으로 다시 갈 고민했지만, 그때는 안전지대를 벗어날 용기가 없었습니다.
결국 4학년 때 임용고시를 봤고 합격했어요. 졸업하자마자 발령이 나서 바로 5학년 담임을 맡았습니다. 용산에 있는 한 학년이 두 반밖에 없는 작은 학교였지요. 학교가 작고 신규 교사였기에 걸스카우트까지 포함해 업무를 5개나 맡았지만 불만은 없었어요. 모든 게 처음이었으니 일을 빨리 배울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담임으로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학급을 운영할 수 있는 점도 좋았어요.
아이들은 저를 잘 따랐고, 저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제가 쏟는 정성만큼 달라지고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보람도 많이 느꼈어요. 다방면에 재주가 있는 편이고, 아이들을 좋아하고, 책임감이 강한 편이라 막상 해보니 교직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미술적 재능도 학급을 꾸미는 데 유용했습니다. 학급 운영도 잘했고, 학생과 학부모에게 인기 있는 교사였어요. 누구보다 제 직업에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교실 밖에서는 늘 답답함을 느꼈어요. 항상 마음 한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마흔을 앞두자, 그 갈증은 더 커지더라고요. 지금 결단하지 않으면 그냥 이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인생이 끝나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안정적인 삶이 오히려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가족과 친구들에게 조심스럽게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넌 뭘 해도 잘할 것 같아. 진짜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말하며 응원해 주더라고요. 결정에 조언을 얻고 싶어 평소 생각이 깨어 있다고 느낀 선생님 두 분을 찾아갔어요. 50대 중반의 남자 부장 선생님과 명예퇴직을 앞둔 60대 여자 선생님이셨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두 분은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박 선생은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그게 어울려."
솔직히 그런 말씀을 하실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는 제 모습을 정작 저는 지금껏 외면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나눈 대화가 제 결정을 굳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며칠 뒤 저는 사직서를 제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