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많이 번다고 종잣돈을 많이 모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번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다.
파이어족이 되려고 마흔에 초등교사를 그만둔 건 아니었다. 그땐 파이어족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다. 교사를 그만두고 가슴 뛰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책을 읽고, 롤모델을 정하고, 강의를 듣고, 실행하다 보니 어느새 그 길 위에 들어서 있었다. 돌아보면 파이어족이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계획하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우리 부부가 40대에 파이어족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간이 흐른 뒤에야 분명하게 보인 사실이 하나 있다. 근로소득이 있을 때 그 돈을 어떻게 썼는지가 종잣돈의 크기를 결정했다는 점이다.
크게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남편은 회사 임원이 된 후 연봉이 크게 올랐다. 나는 15년 차 초등 교사로 세후 월 300만 원 조금 넘는 안정적인 소득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소득을 남에게 보이기 위한 소비에 쓰지 않았다.
남편은 비싼 외제 차도 살 수 있을 정도의 연봉을 받았지만, 실용적인 카니발에 만족했다. 나 역시 주변에 명품을 휘감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굳이 그들처럼 하지 않았다.
명품을 사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명품도 별거 없음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다. 사업으로 성공한 동생이 생일 선물로 명품 가방을 선물해 준 적이 몇 번 있었다. 1년쯤 지났을까? 500만 원 가까이하는 루이뷔통 가방에서 ㄸ냄새가 나기 시작했다.(그래서 이름이 루이뷔'똥'인가 했다는^^;) 검색해 보니 놀랍게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당시 300만 원 가까이하는 고야드 가방의 어깨끈이 녹아서 아끼던 니트를 망가뜨린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 나이 들수록 무겁기만 하고 실용적이지 못한 가죽 가방이 더 짐스럽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절약을 목표로 소비를 줄인 건 아니었다. 그저 ‘우리 삶에 진짜 도움이 되는 선택인가’라는 기준으로 소비를 결정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돈이 남았고, 그 돈이 종잣돈이 되었다.
아이 둘 다 영어유치원 대신 발도르프 숲 유치원을 보냈다. 그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둘째가 태어난 후 첫째가 심심할까 봐 놀이학교에 보낸 적이 있다. 두어 달쯤 다녔을 때 일요일 밤마다 놀이학교에 가기 싫다고 울었다. ‘놀이학교’라는 이름과 달리 아이에게 충분한 놀이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 곳이라는 걸 알았다. 학습 중심의 환경이 첫째의 발달단계와 성향에는 맞지 않았던 거다. 그렇다면 그보다 더 학습 중심인 영어유치원은 첫째와 더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첫째는 길가에 핀 꽃을 보면 만져보고 향을 맡고 좋다고 표현할 정도로 감수성이 섬세한 아이였다. 그런 첫째에게는 자연물로 놀이하고 수작업을 많이 하며 오감을 충분히 자극하는 발도르프 교육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초등학생이 된 뒤에는 영어학원, 수학학원 등 학습 사교육도 시키지 않았다. 첫째는 동네 상가 영어학원에 잠시 다닌 적이 있다. 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 다녀서는 결국 나처럼 시험만 잘 보는 영어를 하게 될 게 뻔히 보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영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가 되었으면 했다. 그래서 영어학원을 그만두고 3년 7개월 동안 엄마표 영어를 했다.
수학도 비슷했다. 첫째가 원해서 동네 수학 공부방에 다닌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아이가 선생님께서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풀이 과정을 다 알려줘서 집에서 자기 속도로 하고 싶다고 했다. 엄마표 영어를 하며 자기주도 학습 습관이 자리 잡던 때였기에, 아이가 자신의 속도에 맞춰 학습하는 경험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후 수학도 집에서 EBS 도움을 받으며 혼자 해나갔다.
아이들이 원하는 학습 환경을 선택하게 했고, 느리더라도 자기 속도에 맞게 학습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었다. 그런 믿음이 청소년인 지금까지도 아이들의 자기주도학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선택들이 사교육비를 얼마나 아꼈을지 궁금해서 대략 계산해 보았다.
영어유치원 : 200만 원 × 12개월 × 3년 × 2명 = 1억 4,400만 원
영어학원 : 25만 원 × 12개월 × 6년 × 2명 = 3,600만 원
수학학원 : 25만 원 × 12개월 × 6년 × 2명 = 3,600만 원
이것만 합쳐도 2억 원이 넘는 돈이다. 아이 친구들이 많이 다녔던 논술, 과학학원 등을 포함하면 금액은 더 늘어날 것이다. 이 선택들이 모여 결국 종잣돈에 보탬이 되었다.
종잣돈의 원천은 결국 근로소득이었다. 자본소득을 벌게 되면서 오히려 근로소득의 가치를 더 깊이 알게 되었다. 과거의 근로소득이 지금의 나를 위한 일꾼이 되었음을 깨닫게 된 거다. 그 돈은 불평도 하지 않고, 24시간 나를 위해 일해주는 소중한 일꾼이 되었다.
근로소득은 단순히 현재의 소비 생활과 생활비를 위한 돈이 아니다. 미래 자산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이고 강력한 도구다. 매달 들어오는 월급이 있을 때가 돈을 모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시기다. 그때 잘 쌓아둔 종잣돈이 나중에 삶의 선택권을 넓혀준다.
우리 부부는 계획적으로 종잣돈을 모으진 않았지만 과시적 소비를 하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학습 사교육을 시키지 않았으며, 근로소득을 성실하게 쌓아갔을 뿐이었다. 그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삶을 만들어주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면 나는 과거에 나에게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돈 벌 수 있을 때 악착같이 모아라.
그 돈이 네 인생을 자유롭게 하고 미래의 선택권을 넓혀줄, 소중한 '미래의 씨앗'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