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이 잠들지 못하고 쉽게 잠이 깨어버리는 나로선 '푹잠 자는 날'은 '운수 좋은 날'이다.일단 잠에 쉽게 들지 못한다. 누워서 30분 이상 뒤척뒤척. 잠을 위한 버퍼링 단계를 거친다. 어렵사리 잠에 들지만 푹 잠들지 못하고 자꾸 깨는 ‘수면유지장애’의 늪에 빠진다. 그리고 중간에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들지 못하고 또다시 뒤척뒤척 모드로 넘어간다. 아침이다.
의학적으로 ‘불면증’이란 수면을 취할 수 있는 환경과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수면이상’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잦은 불면증의 밤은 피로와 두통, 판단력 등 인지능력 저하, 의욕 저하 증상, 면역 기능 저하를 불러일으킨 다한다. 하여 어느 순간부터 푹잠이 큰 숙제가 되었다. 하루 중 유일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하루를 잘 마무리하기 위한 거창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처럼.
신접살림을 준비하면서 다른 살림템에 비해 최상급 매트리스로 무게를 싣었다.잠들기 전,숙면을 위한 아로마 오일을 뿌렸고 눈에 포근한 수면 안대를 둘렀으며 거북목을 위한 베개를 벴다.육아 말고 수면에도 장비빨은 적용될 것인가.
하지만 장비빨 말고 결혼 후, 출산 후의 나에게 과연 '숙면을 취할 수 있는 환경'은 만들어졌는지 생각해 봤다. 아니었다. 그렇다고 학부형 된 지금, 나는 스스로 숙면을 위한 밤을 준비하는가, 돌이켜봤다. 아니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나는 숙면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불면증을 아쉬워하는 꼴이었다.
<결혼 후 수면 패턴 단상>
1. 신혼기 : 배우자의 코골이 + 수면 무호흡증
남편의 코골이와 수면 무호흡증에도 불구하고 신혼 때는 침대에서 남편의 옆을 벗어나거나 등을 돌리고 자는 것도 큰 배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겼다.남편 옆에서, 남편을 바라보고 잠을 잤다.
야식과 음주를 함께 즐기며 매일 영화 한 편을 보고 잠에 들었는데... 취침 전 같은 활동 패턴으로 움직였음에도 남편은 베개에 머리만 대면 이내 잠에 들었다. 딱 3초 컷. 그리고 염치없이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했다. 코골이의 정점에서는 수면 무호흡증으로 꺽꺽대었다. 그러다 숨이 멎었나, 싶을 정도의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그의 품 안에서 코골이를 감내하다, 난데없이 고요함이 느껴지면 새우잠을 자다 굽힌 등을 쭉 펴보는데... 그럼 다시 푹 내쉬는 숨소리와 함께 코골이가 이어졌다. 신혼 때는 남편을 살리는 셈 치고, 자주 불침번을 섰다.
2. 난임기
난임을 겪으며 난임 스트레스가 온몸을 사로잡았다.난임을 인정하기 전엔, 숱한 밤_극히 낮은 자연 임신 성공률에 도전했다. 그러다 산부인과에서 배란일을 잡아, 숙제처럼 거사를 치렀다. 최상의 정자 활동성을 위해 거사의 밤 이틀 전부터 보양식을 요리하고 남편의 음주를 막았다.
난임을 받아들이고 나선, 채취를 앞둔 어떤 날엔 밤에 맞는 엉덩이 근육주사나 배주사들로 감정이 몽글몽글해졌고 어떤 날엔 난임에 대한 신세한탄과 자기 연민으로 베갯잇을 적시는 밤을 보냈다.
3. 임신기
가까스로 임신을 하고선 쌍둥이를 품은 배가, 어찌 될까 싶어 경직에 노심초사하는 밤을 보냈다. 임신 초기 3번의 하혈과, 위액까지 토해내던 입덧 기를 겪으며 잠은 또 그렇게 달아났다.
4. 영아기
출산 후 육아기에 접어들자3시간마다 젖을 물렸다, 분유를 타게 되었다. 30분 동안은 딸에게 젖을 물리고 30분 동안은 아들에게 분유를 먹이고. 밤 시간 동안 3시간 텀으로 두 아이 사이를 오갔다.그렇게 자는 잠이 퀄리티가 좋았을 리 만무하다.
3.유아기
아이들이 꼬물이를 벗어나 통잠의 기적을 누리게 되면서 내 포지션이 바뀌었다. 침대 위 남편 옆이 아니라 침대 아래 매트 위 쌍둥이 사이가 내 자리가 된 것인데... 아이들 사이에서 새우잠을 자다, 이 아이, 저 아이 뒤척거릴 때마다 강제 기상했다. 그 누구도 시킨 건 아니었지만 아이들 앞에 유독 예민하던 내 몸은 사소한 뒤척임 하나하나에도 기가 막히게 반응했다. 아이 몸을 토닥거리며 이내 잠에 들었다.열 보초를 서야 하는 밤도 빈번했다.
4. 아동기, 간간히 푹잠 찬스
비로소 일주일에 다만 몇 번이라도 통잠과 푹잠의 천국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남편과 애착 형성이 잘 된 아들이, 남편과 침대에서 잠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난 매트 위에서 가녀린 딸을 애착 인형 삼아 잠을 잤다.
초저녁에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 자울자울 조는 날이 늘었다. 속 모르는 아들은 "엄마 눈떠! 책 읽어줘야지!" 책 읽기를 종용했고 나이는 어려도 배려심 깊은 딸은 조용히 책을 덮어주었다. 그렇게 동화책을 읽어주다 졸다 잠에 드는 날이면 그다음 날 아침까지 거뜬하게 통잠과 푹잠을 잘 수 있었다.
5. 초등학교 1학년, 분리수면의 시작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통잠 천국을 누리며 행복감을 만끽했는데... 쌍둥이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남편은 분리 수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암막 커튼이 없다는 핑계로 며칠을 삐대고, 학교적응한다는 이유로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 5월, 남편은 각자의 방에서 분리수면을 강행했다. 아들은 든든한 애착인형. 딸은 가녀린 나의 애착인형이었건만.다른 결로 부드럽던 애착인형을 잃은 나는 아이들보다 더 분리수면을 혼란스러워했다. 한 방에서 네 식구 잠자던 모드라 남편의 코골이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은 없었지만 바로 옆, 아이의 새근새근 숨소리에평온했었는데... 코골이의 거리감이 가까워지고 가끔 더듬더듬하는 검은 팔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나면 그 밤의 잠은 또 그렇게 달아났다.
6. 육퇴살롱, 부부의 취미
결혼 후부터 최근까지 육퇴살롱은 일주일에 1-2번 빼고 거의 매일밤 오픈했다. 남편의 취향, 스릴러 물이 자주 상영되던 육퇴 시네마가 빈번히 열렸고 육퇴 시네마 옆에선 컵라면과 오징어를 파는 매점이 열렸다.
컵라면을 후루룩 거리다, 오징어를 질겅거리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남편이 잠들기 전까지 애먼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불면증에 있어, 잠자기 전 스마트폰과 TV 등은 수면 호르몬, 멜라토닌 도둑이라던데... 하물며 야식에, 스마트폰, TV 3종 세트라니. 즐길 거 다 즐기고도, 숙면을 바라는 내가 염치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유 없는 불면증은 없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