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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우스 메이트 일지

단지 공직자와 교직원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유만으로, 어렴풋이 "여자 직업으로 공무원, 선생님만큼 좋은 직업은 없어."라는 말을 듣고, 생각하며 살았다.


요즘 mz세대들에게, 무슨 구시대적 발상이냐 지탄이 쏟아질지 모르지만 나 때는 특히 그러했다.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평생 안정 직장이라는 공무원, 여교사의 집단에 속하는 게 인생 큰 효도처럼 여겨지던 때.


어느 날, 마음에도 없는 공무원 시험공부는 때려치우겠노라고, 독서실을 뛰쳐나왔다. 친구 따라 생각에도 없던 대한 항공 면접을 몰래 보고 얼떨결에 임원진 면접까지 올라간 게 화근이었다. 그리고 난 한 칸 독서실뿐만 아니라 48평 고향집도 뛰쳐나갔다. 치지도 않던, 자리만 차지한다 싶었던, 피아노를 팔아 서울 고시원 310호의 여자 3번이 되었다.


안락한 공부방에서 챙겨주시는 간식을 먹어가며 대학 4년 내내 영어 과외 아르바이트로 꿀을 빨았건만... 승무원 취업 준비생으로,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부턴,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면서 통장에 꽂힌 최저시급을 고시원 비로 바로 이체했다.


혹독한 서울살이 속, 거처는 주기적으로 바뀌었다.  고시원 310호, 다른 고시원 504호를 거쳐 오피스텔로 살림을 옮겨갔다. 그리고 하우스메이트들도 시시때때로 바뀌었다.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에서 근무하게 된 효녀 여교사 동생에게 신세를 지게 되면서 덩달아 신사동 오피스텔로 이사를 갔다. 분명 지상 입구로 들어갔던 볕 잘 드는 1층 오피스텔이라고 소개받았던 그곳은 볕이 드문드문 들던 반지하였는데... 철장 두 개가 누군가의 고의로 파손되고 침입의 시도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 후 또다시 이사를 했다. 강남을 벗어나 좀 더 넓고 안전이 보장된 구로구의 오피스텔이었다. 교사 동생 인사발령 찬스가 끝난 뒤론 고위공직자 과정을 위해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된 아버지에 빌붙어 살았다. 그 찬스가 끝났을 때, 통번역 회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살림이 약간 나아졌다. 아버지가 고향으로 내려가신 후엔 복층 오피스텔에서 총 3명의 여자 룸 메이트들과, 상암동 아파트에서 총 3명의 여자 하우스 메이트들과 살게 되었다.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두바이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또 3명의 하우스메이트들을 만났다.


동성의 하우스메이트들이었지만, 우린 지속적으로 소음, 서로 다른 생활 패턴 등으로 분란을 겪었다. 아침 종달새 형인 나는, 올빼미형 하우스메이트 1의 새벽까지 이어지는 컴퓨터 화면 블루라이트가 불편했다. 끊지 않는 전화 통화의 대화를 엿듣게 되는 것이 불쾌했다. 냉장고 속, 주인 있는 음식은 누가 먹었을까_에 대한 이슈로 신경전하는 것이 쩨쩨했다. 샤워 후, 닦지 않는 물기와 남기고 간 pubic hair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부끄러웠다.



두바이 생활이 시작되면서, 하우스 메이트들의 국적은 글로벌해졌다. 춤과 노래를 좋아하던 필리핀 동료, 개인적인 영역을 중시하며 속내를 알기 힘들었던 일본인 동료, 지나갈 때마다 떡진 머리가 신경 쓰였던 중국인 동료, 같은 한국인이면서도 왕따 문화를 조장하던 한국인 동료... 호텔에서 근무하며 아파트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하우스메이트들과, 룸메이트들과 소음, 위생, 역할 분담, 험담, 왕따 문제로 지속적으로 머리가 시끄러웠다.


타인과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고요와 평화, 안온함을 기대하는 건
애당초 큰 욕심이었다.


좀처럼 국제 전화 한 통 없던 엄마에게서, 친정 아빠의 암 투병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하게 되면서 메이트들과의 이슈는 끝이 났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48평 우리 집은, 예전 학생 때만큼 안락하지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공무원이 싫다며 책들을 던지고 호기롭게 떠났지만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겐 벗을 승무원 유니폼이 없었다. 평생직장의 타이틀 대신 여느 승무원 친구들처럼 세계 여행 기회 제공, 각국의 기념품 세례 등으로 효도할 줄 알았지만 그 마저도 없었다. 아픈 아버지에게 그 시점에 할 수 있는 효도라고 고작 생각났던 건, 결혼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혼은 또 쉬웠을까.


진지한 만남에서부터, 결혼에 이르게 되기까지... 또 결혼을 결심한 후로, 안정된 새로운 울타리인 거처를 마련하고 혼수를 준비하게 되기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성사되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결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평생 나의 룸 메이트와, 기존에 경험하였던 주제들 이상의 새로운 이슈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남편의 극심한 코골이와 수면 무호흡증 이슈, 소소한 것에서부터 집안일 역할 분담의 문제가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는 한 시간가량의 긴 샤워에 대해 이해해야 했다. 다 쓴 물건을 놓았던 위치를 놓고 싸웠다. 퇴근 후 매일 마시는 맥주 4캔과 다 마신 맥주캔을 스스로 버리지 않는 문제를 놓고 언성을 높였다. 매 주말마다 번갈아가며 시댁과 친정을 가는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일 때가 있었다. 명절 연휴에,  시누이들이 올 시점과, 친정 자매들이 오는 시점이 겹친다는 것이 트러블 거리가 될 때가 있었다. '며느리 역할'과 '사위 대접' 사이의 무게를 놓고 다툴 때가 있었다. 나와 남편을 넘어서서 다른 가족들로 가족의 범주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권력관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랑이 넘치는 견고한 공동체를 꿈꿨지만 시시때때로 불편해졌고 쩨쩨했다. 이해되지 않고, 합의되지 않은 채로 양보해야 하는 것이 억울했다. 의도치 않게, 내 내면 밑바닥의 욕구와 욕망을 들킬 때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다 30년 평생도록 마주한 적 없던 새로운 자아가 발현되는 때도 있어 당황스러웠다.


다른 하우스메이트들과 분쟁이 생겼을 때는 기다릴 계약 만료 시점이 분명했다. 인사 팀에 컴플레인을 거쳐 조정의 기회도 주어졌다. 하지만 결혼 생활엔 계약 만료의 시점, 정정의 기회는 없었다.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남편과 아내의 도리를 다할 것이라고 맹세했건만. 일가친척들과 친지들 앞에서 일생동안 고락을 함께 하겠다, 선언했건만.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인, 평생을 약속한 나의 하우스메이트, 룸메이트와 평화롭게 시공간을 넘어서 지극히 사소로운 일상의 매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을까.


나의 이번 효도는 성공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결혼이 효도가 될 수 없다. 아픈 아버지에게 곰같이 푸근한 남편과 알콩달콩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여드리고 토끼 같은 손주들을 안겨드리는 것이 효도의 방책이 될 수는 없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효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름 아닌 내가 잘 살기 위해, 내가 행복하기 위해, 하루하루 현명해져야 했다. 균형을 잘 잡아야 했다.



우리는 외래종 과일 재배방법과 마이크로 반도체 제작법은 알고 있지만 결혼 생활을 꾸려나가는 일에 관한 한 효과적인 방법을 찾지 못해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결혼해서 잘 사는 법을 굳이 배우지 않아도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비행기 착륙법이나 외과 수술법을 직관으로 터득하길 기대해선 안되듯이 아무런 도움도 없이 더불어 살기라는 과업을 완수하는 비결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선 안된다.

- <사랑의 기초, 한 남자> ,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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