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난소 기능 저하로소이다.

시험관 두 번째 시술

by 김여희

겨우 시험관 시술 한 번 시도했을 뿐인데. 멋모르는 초보 난임러는 온 세상의 고난을 다 겪은 모양새로 겨울을 지내었다.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설 때였다. “무릇 모든 시작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있어. 그것이 우리를 지키고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헤르만 헤세 <생의 계단>에서의 문장처럼 내 시작에도 신비한 기운이 깃들길 바랐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기운을 빌어 다시금 난임 폴더를 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새 생명을 틔우기 위해 새롭게 다지는 마음이니 더더욱 신비한 힘을 실어주지 않을까. 시험관 관련 카페에 몇 가입했고 임신에 도움이 될만한 책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그리고 폭풍 병원 검색 후, 어렵사리 병원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간의 히스토리를 모두 지우고 병원을 옮겨보마, 결정했던 데에는 이식 실패, 냉동 난자 비축 실패라는 처절한 성적표보단 역시 돈이 주는 부담감이 더 컸다. 광주에서 부산을 오가는 동안 순수 교통비로만 20만 원이 들었던데 그거라도 아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여행이 아닌 병원을 목적지로 나서는 외출 길에 소진되는 에너지도 줄여보마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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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의 첫 시술을 시작하기 전, 난임 카페에서 여러 글들을 읽었다. 성공 후기들을 간절한 마음으로 검색했다. 언젠가 임신 방으로 이동할 그때를 기약하며 수십 개의 글을 읽고 광주 난임 병원 2곳으로 압축시켰다. 나보다 더 열악한 조건 속에서 시험관 시술에 빨리 성공한 사례만을 검색했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임 카페 속의 광고일지도 모를 많은 글들 속에서 진정성을 찾는 일. 나보다 더 열악하거나 나만큼의 사정을 가지고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한 사례를 찾는 일. 병원을 검색하는 데만도 많은 공력이 들었다. 많은 산부인과들 중, 나와 맞을 난임 병원을 찾는 것, 내게 난임 탈출 임신 성공에의 목걸이를 걸어줄 그런 의사 선생님을 찾는 일이란. 언제까지 그놈의 인연을 찾아 나서야 한단 말인가. 결국 난임 카페에서의 정보 속의 홍수에서 허우적거리다 지인들에게까지 도움을 청할 지경에 이르렀다. 병원 선정 과정에서, 시험관 시술에 대해 비밀로 할 것인가_는 나중에의 문제였다. 소문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기보다 우선 급한 불을 끄는 게 먼저였다. 최대한 여러 곳에 도움과 정보를 구했다. 책을 뒤적거리기엔, 지금의 내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이 많았고 시험관 시술의 아픔조차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채 병원 홍보만이 있는 의료인의 포스팅도 걸러야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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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시킨 두 곳의 병원들을 차례로 방문했다. 첫 번째 병원과 두 번째 병원의 온도는 매우 달랐다. 첫 번째 병원 의사 선생님께서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세상의 모든 따뜻한 말과 응원의 메시지를 보여주셨다. 마음을 열고 기댈 뻔했다. 하지만 시작은 온기가 넘쳤느나 결국 자궁경 제안과 각종 영양제, 호르몬 주사 추천으로 끝이 났다. 뒤도 안 돌아보고 병원문을 닫고 나왔다. 딱한 사정을 헤아리는 듯 하면서 뒤로는 잇 속을 챙기기 바쁜 여우 같은 친구 같았다. 또는 마음이 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진도만 훅 빼려고 하는, 썸남들 중 한 타입 같았다. 첫 이식 실패 이후, 생리 주기가 틀어진 데다, 두 번째 생리는 한참이나 늦어지기까지 해서 겁이 덜컥 났던 때였는데 빤히 보이는 병원 영업에 마음이 상했다. 늦어지는 생리에 대한 처방으로, 생리 유도제만 맞고 몇 차례의 피검사만 거친 후 첫 병원은 리스트에서 지웠다.

두 번째 병원에서의 온도는 차가울 정도로 무미건조했다. 병원이라기보단 거대한 사업체에 가까운 느낌. 간호사들은 형식적이거나 사무적이었고 의사 선생님은 다소 무관심하거나 기계적이었다. 하지만 과배란 시술에의 자신감을 내비치셨고 첫 번째 병원에서처럼 이것저것 권하지 않으셨다. ‘무미건조함’을 ‘쿨함’으로 해석하고 두 번째 병원에서 시술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광주 산부인과 중에서도 난임으로 유명하다는 병원의 선생님, 그녀는 내게 삼신할매일 것인가. 다른 사람들의 성공 후기에 기대를 걸어보며 광주에서의 첫 시술을 시작했다. 살뜰히 주사 종류를 기록하던 1차 시술 때와는 달리 2차 시술 때는 주사 종류도 기록하지 않았다. 주사 한 대 한 대, 맞을 때마다 자기 연민과 서러움 사이를 오가지도 않았다. 병원을 거쳐 약국에 이르기까지, 숭덩숭덩 빠져나가던 카드 결제내역도 셈하지 않았다. 한 템포 쉬어가는 겨울을 보내고 온 봄날의 나는, 한결 가벼워져있었다. 배란일 테스트기를 잡고서 신랑에게 괜한 압박감을 주지 않아도 되었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침의 첫 소변에, 임신 테스트기를 갖다 대지 않아서 좋았다. 기대감을 덜어내니 실망감도 덜해 좋았고 스스로 날짜를 세 알리며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그저, 병원에서 내어주는 주사들과 약을, 빼곡히 민트색 냉장 가방 안에 담아와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과배란 주사를 맞았다. 부지런히 난포를 키워 난자 채취할 날만 기다리면 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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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음파 상으로 난자가 6개 정도 보인다고 했다. 겨울에 충전했던 에너지들이 난자들에 힘을 실어주었나 싶어 안도했다. ‘아무리 유명한 병원이라고 한들, 부산까지 가는 먼 걸음이 지치게도 하였지... 할랑할랑 나들이길이 아닌 병원 가는 길이었으니까.’ 병원을 옮기길 잘했다며 스스로 칭찬도 해보았다.

그런데 막상, 난자 채취일, 난자는 1개 채취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는 곧 미성숙 난자라며 폐기했다는 소식으로 이어졌다. 결국 0이었다. 내 걱정과 두려움 어린 넋두리를 초반에 차단하고 “걱정은 제가 합니다.” 대화를 마무리짓던 의사 선생님이었다. 다소 사무적이던 그 응대를, 쿨내 나는 확신으로 받아들이고 내심 기대하였는데 난자 채취 0이라니. 참담함과 함께, 끝없이 자존감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폐기했다던 미성숙 난자 하나가, 이렇게 아쉬워질 줄이야. 다 큰 아이를 잃기라도 한 듯, 죽은 아이 불알 만지는 엄마의 심경 즈음되어 심히 먹먹해졌다.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과배란 주사를 몇 대를 맞았는데. 그간 먹었던 영양제의 양은 얼마만큼이었는데. 이 한 번의 시술에, 228만 원의 돈이 들었는데...! 이식은커녕, 채취에서부터 실패라니.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 자궁 어딘가쯤에서 228만 원과 숱한 영양제들이 공중분해된 느낌이었다. 성공에 이르기 위해 검색한 숱한 성공사례들이 날 비웃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쉽게 성공할 줄 알았니. 우리가 어떻게 한 임신인데.' 속삭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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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심한 생리통에, 급기야 119 구급차에 싣려 신촌 어느 병원 침대에 눕혀졌던 그날부터 이미 잘못되었을까. 자궁 내막에 작은 낭종이 있다고 하던 그때, 수술로 단박에 제거하지 않고 차츰 사라지기를 기다렸던 게 문제였을까. 남들은 다 덥다고 하는 여름날에도, 춥다며 양말을 신고 담요를 감싸 메게 하던 체질이 잘못된 걸까. 몇 해 전, 자궁 수술을 받았던 엄마를 보건대 유전적으로 자궁이 약한 걸까.


6개나 보인다고 했던 난자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마저도 살아남지 못한 미성숙 난자는 그토록이나 약했던 걸까.


남들은 10-20개의 난자를 냉동시켜놓고 야금야금 꺼내어 이식을 해도 매번 실패를 맛본다고 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식만 7년째. 5년 이상의 난임 생활을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한 번의 이식도 이렇게 어려운 걸까. 희망을 품으며 온기로 가득 채워 넣었던 겨울보다 더 혹독한 꽃샘추위 속으로 나는 다시 들어갔다.


나에게서 싹이나 틔울 수 있으려나.


씨앗 하나 생성해내지 못하는 척박함으로, 난 엄마가 될 수 있으려나. 그렇다. 나는 35세 이상이면서도, 그중에서도 난소 기능이 떨어진다는 난소 기능 저하 그룹에 속해있었다. 다른 그룹에 비해 난자질이 떨어져 시험관 아기 시술 성공률도 낮다는 꼴찌 중의 꼴찌 그룹. 신비한 힘이 깃들길 바라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혹독한 현실에,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야 할까. 더한 한파가 깃들기 전에, 지금이라도 박차고 나가야 하는 걸까. 선택의 기로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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