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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Oct 18. 2024

장례식장에서 뜻밖의 응원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은밀한 취미를 응원합니다

본캐, 외항사 승무원이 되어 비행 일기를 글로 쓰는 부캐,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집 피아노까지 팔고 패기 있게 서울로 떠난 것치곤 씁쓸하고도 처절한 결말이다. 하여, 우리 집 다섯 똘망이들이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요즘 친정집에서 '피아노'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조용히 자리를 는 버릇이 생겼다. 아이들이 행여

그런데, 엄마 피아노는 어디에 있어?
외할머니가 피아노 안 사주셨어?


묻기라고 할까 봐. 그럼 그때


(아, 엄마가 원대한 꿈을 위해 독립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피아노를 발판 삼아 집을 떠났어.)


말할 낯짝은 안되었던 탓이다.



하지만 외항사 승무원은 못 됐을지언정, 두바이에서도 틈틈이 늘 글은 썼다. 부르즈 칼리파(Burj Khalifa)가 보이는 로컬 카페에 앉아 카페 라테를 마시며 늘 노트북 앞에서 무언가 똥당거리는 동양인 여자. 어느 날 제법 단골이 된 모양이었는지 매니저가 카페 라테를 두 잔 더 리필해 주었다. 뜻밖의 인심에 그날 밤, 잠은 통으로 못 이루고 글을 썼던 적이 있다. 서비스로 커피 2잔 더 준 인도인 매니저의 마음에, 충분히 응답하는 마음으로.


나의 글은 응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 두바이에서 썼던 글들은 지금도 남아있지만 열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오글거렸다. 만한 건 모두 포용하게 된 아줌마 감성마저도 뒤돌아서게 만드는 허황된 글들. 부끄러웠다.


늘 혼자 쓰던 글들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쓰게 됐던 건 블로그 한 칸을 얻게 되면서였다. 가족들에겐 짜증으로, 친구들에겐 자격지심으로, 나 혼자선 자기 연민으로 얼룩져있던 때. 나는 온라인 속 블로그라는 굴에 몸을 숨겼다.


블로그를 개설하고 그 안에 여러 방을 꾸몄다. 땅 속에 방을 여럿 놓고 방마다 세를 받는 두더지 하숙집 여주인이 된 것 마냥 든든했다.


시험관 병원이 다니며 쭈굴 해진 마음을 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 소중했다.


쨍한 햇볕 속에서도 언제든 먹구름 동동, 눈물 뚝뚝 비를 흩뿌릴 준비가 되어있던 염세주의자가 어둠 속에서 촛불 하나 밝히곤 배시시 웃을 수 있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임 일상 중 실업자 급여를 받으며 '플라워 샵 창업반' 수업은 들었건만 꽃집 사장님이 될 수는 없었던 현실. 낮엔 꽃 사진을 띄우며 꽃 이야기를 하니 꽃집을 오픈한 것 마냥 신이 났고 밤엔 새댁 요리 레시피를 올리며 야식을 만 새댁 선술집을 오픈한 양, 또 즐거웠다.


하지만 어느 날 이런저런 이유로 내 땅 속 굴들을 흙에 파묻게 되었다. 방방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삽으로 헤집곤 애먼 흙을 덮어 발로 으깨듯 밟았다. 마음이 뭉개지고 찌푸려졌다.


가까스로 쌍둥이를 임신하고 출산, 육아의 고개를 넘다가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게 되면서... 닫아놓았던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두더지 방에 흩어있던 난임일상 속의 글들의 흙먼지를 털고 조각조각 이어 붙여서 '슬기로운 난임생활' 책을 출간했다. 출간이란 늘 작가를 꿈꾸었던 나로선 기적 같은 일. 외로웠던 난임일상을 들려주고, 나처럼 굴 속에 은둔자로 있을지 모르는 누군가에게 아기를 기다리는, 엄마를 준비하는, 위대한 여정 속에 있으니 볕으로 나오라고... 손을 이끄는 은밀한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썼던 글들이었다.


더 이상 혼자 쓰는 일기 같은 글이 아니라 기뻤고 출간으로, 이전보다 자신감 있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뿌듯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난임으로 애 낳은 것이 무슨 자랑거리라고.)

(시험관 시술을 했으면 얼마나 오랜 기간 했다고.)

(양식장에서 임신해 낳은 아이들!)


라는 비아냥 소리가 들려왔다. 


그나마 내 책을 자랑스러워했던 제부는, 난임을 겪고 있는 회사 동료에게 책을 선물했다가 도리어 역정 어린 말을 들었다 했다.


기적 같았던 내 책, 내 글들은 그랬다. 누군가 온전히 응원하고 '장하다' 칭찬해주지 않았던 책. '너무 좋은 책이야. 한번 읽어봐.' 좋은 책이 생각나면 선물해 주게 되는 그런 책이 아니었다.


'저출산 대책과 난임'이라는 주제로 KBS, MBC, CBS 등 방송사를 통해 인터뷰를 하게 되고 간간히 책이 소개되었지만... 때때로 새로운 도서관을 찾을 때마다 '도서 검색'을 하면 'OOO에 대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문구만 확인하게 되어 풀이 죽었다. 도서 구입비 목록에도 잘 들어가지 않는 책인 모양이다.


그런데 남편의 회사 동료로 장례식장에 오게 된 조문객 한 분이 남편 손도 아닌 내 손을 잡으시며 속삭이셨다.


작가님 책 너무 잘 읽었어요.
작가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책으로 너무 위로를 받아서
저 혼자 내적 친밀감이 있어요.


참으로 이상한 장례식장이었다. 늘 '전업주부입니다만...' 자신 없게 나를 소개하다가 누군가 아주 드물게 '작가님' 불러주는 이가 있으면 방방 뛰는 카카오 프렌즈 무지가 되어 귀를 쫑긋거리는 사람에게...


그냥 작가님도 아니고, '내적 친밀감을 느끼는 작가님'이라는 말을 건네는 조문객을 만나게 하는 장례식장이라니.



치마 끝자락에 튄 빨간 육개장 국물로 포인트를 준 상복을 입고 연신 눈물을 닦는 와중에도 아이라이너 번짐을 걱정하던 나는 잠시 밝고 쾌활한 무지가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인사를 나눠주신 조문객 독자님께 홍어를 촘촘히 담은 접시에, 새초롬하게 별미여서 연신 먹게 되던 매력의 매실장아찌를 가득 얹어 가져다 드리고 싶을 만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두 번째 날, 10년 만에 만난 남사친과 조우하고서... 장례식장 정문 앞에서 잃어버린 10년을 10분 동안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남사친은 말했다.


나, 책도 사서 봤다.
잘 썼더라.


10년 동안 연락 한번 없었으면서 '늘 보고 있었다' 말하는 친구의 멱살을 잡으려다... 등을 다독이게 만들던 한 마디였다.


가끔 학교 앞을 지나칠 때마다, 대왕김밥집 간판을 볼 때마다 감정형 나는 매번 눈물만 훔쳤다. 카카오톡 숨김 목록에 넣어둔 친구에게 먼저 연락을 할까 싶다가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서 애먼 노래만 바꿔 틀었다.


10년의 시간을 넘어서 이제 눈가 주름을 걱정하며 잘 웃지도 않는 얼굴,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며 화내는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서 굳어진 표정의 얼굴로, 다시 만나서 뭐 하겠냐며. 신나는 노래 속에 애써 몸을 둠칫거렸다.


그런데, 팔린 100권의 책 중 두 명의 독자를 장례식장에서 만나게 되다니. 응원까지 받다니.



10년의 일상 속, 곁에는 없었어도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어디선가 나를 만날까 봐 두리번거리기도 했다는 것. 그리고 늘 응원하고 있었다는 것.


이 녀석아. 나는 대왕김밥집 앞에
지나갈 때마다 울었어!


부끄러워서 카카오톡 메인사진에 올린 적도 없던 책은 어떻게 찾아 읽었으며 알리지도 않음 부고에, 어떻게 장례식장은 알고 왔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반갑고 감격스러웠다.


언젠가 나의 책에 대해 '내 책은 누군가 선물해 주고 추천하는 그런 책은 아니야' 푸념했을 때

그런 걸 뭐 하러 걱정하냐.
니 책을 읽고 난임을 겪는 사람 한 명이라도
힘을 얻었다, 하면 그걸로 된 거지.


그게 한 명뿐이라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말해주던 어느 친구의 말도 스치고 지나갔다.


쌍무지개가 뜨는 밤이 분명했다. 내 인생, 대단한 글을 쓰는 일은 없더라도 그저 내가 좋아하는 글을 당당히 쓰면 될 일이었다. 나의 은밀한 취미에, 누군가의 응원이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예상치 못한 응원까지 받았던 운수 좋은 순간이었다.



뭘 쓰든, 잘 쓰든, 못 쓰든.

이제 땅 속 두더지 하숙집 아줌마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소곡집 피아노 치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박수만큼의 응원을 받지 못한 글들이라도, 용기를 내겠다고.

내 감정을 배설하고 내 마음을 정리하는 은밀한 시간 앞에, 당당해지겠다고.


글을 쓰는 우리 모두는, 그냥 작가다. 글이라는 씨앗을 뿌리고 간간히 마음의 영근 열매를 얻기도 하는 텃밭지기. 모든 일상 속에서 무수히 많은 글감들을 발견해 낼 수 있는, 보석 같은 눈을 가진 탐색자들. 그러다 아주 가끔 '괜찮은 글들'을 산삼처럼 캐기도 하는 심마니. 그러니 그게 뭐든 쓰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큰 응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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