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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Oct 16. 2024

경조사비도, 인간관계도, 기브 앤 테이크일까요.

난임 챕터로 넘어간 이후로 쭉 외벌이 살림이었다. 하지만 출산을 넘어 육아 챕터에 들어서고 나니

맞벌이 가정이 되긴, 글렀구나.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최저 시급이 9,860원인 와중에, 국내산 친환경 당근 3개 500g를 6,000 원주고 사야 하는 물가라서 그랬고.


최저시급 받고 '남의 돈' 액수보다, 아이 돌봄 서비스 비용로 나가는 '내 돈'이 많을 거라는 셈 법도 명확해서 그랬다.


4인 가족 외벌이, 긴 서두 끝에 주섬주섬 결론을 꺼내 들자면, 다달이 나가는 경조사비는 늘 부담스러운 항목이었다.



머릿속으로 축하와 응원, 애도의 마음을 생각하기 전에, 이미 경조사비를 지출하러 마중 나가는 손이 달달 떨렸다.


'경조사비의 기브 앤 테이크'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지만 그때의 사정과 치솟는 물가와 주거비, 고용 불안정성의  지사정은 엄연히 다른데...'기브 앤 테이크'라는 말 애초에 가당키나 한 건가, 생각이 슬그머니. 입술을 삐쭉거렸고.


내가 갔던 결혼식에, 축의금도 없이 오지 않은 누군가를  괘씸해하며 헛웃음을 날렸다가. 내 결혼식엔 왔지만 아직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비혼주의자로 추정되는 경우 '그 돈은 과연 굳은 걸까.' 갸우뚱하가.


때때로 찾아드는 경조사 알림에 이런저런 숫자들을 동동 띄우며 직관적으로 임했다가 급기야 인간관계 딜레마 운운하며, 감정적으로 치우쳤다.


경조사 한 번으로, 인간관계를 셈할 수 있을까요

어느 인간관계 코칭 전문가는, 어느 정도 가까운 사람이라면 “경조사비를 ‘교환’이 아니라 ‘투자’로 생각하라. 상대와 나의 ‘관계 계좌’에 투자하는 것”이라며 형편이 되는 선 안에서 넉넉하게 하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

경조사비 액수는 이 관계에 대한 나의 신뢰와 성의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8년 전, 홀어머니와 함께 살던 친구가 부고를 알려왔다. 시내버스 타고 고속터미널에 가는 1시간에, 3시간 30분 고속버스 타는 시간을 더해 부천에 갔다. 시험관 시술 병원비로 수백만 원의 돈이 기약도 없이 숭덩 빠져나가던 지갑 사정이었다. 하지만 그땐 외벌이 난임러의 계산법 머릿속에서 꺼내들 지도 않았다. 


뵌 적은 없지만 이른 새벽 첫 차를 타고 출근해 호텔 청소일을 하시며 홀로 아이를 키우셨다던 친구 어머님의 노고에, 존경이라는 마음을 담아 국화꽃 한 송이 올려드리고 싶었던 마음었다.


형제자매도 없이, 친척들과의 왕래도 없이, 늘 혼자였다는 친구에게... 이 날은 여느 날보다 더 외롭고 슬 날일 것 같아서... 어깨라도 다독여주고 싶었던 마음었다.


왁자지껄 장례식장까진 아닐 테니, 적어도 상주 자리에 혼자 앉아있을 친구가 머쓱하지 않을... 단한 장례식장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온통 그런 마음들 뿐이었다.


하루 사이 왕복 9시간짜리의 길을 나서 어깨보냉 가방을 단디 메었다. 꽁꽁 얼어붙은 아이스 팩 옆으로, 시간 맞춰 맞아야 할 주사액들이 연신 달그락거렸다.


열 손가락에 들어올 만큼 몇 안 되는 조문객들 사이에 상주인 친구는, 영락없 엄마 잃은 어린아이처럼 작고 여리게만 보였다. '내 인생, 혼자 장례식장은 처음'이어서... 조문 예절이라고 하기엔 어설픔 투성이었지만 잠시나마 마음의 온기가 꼬박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어 혼자 밥을 먹었다. 플라스틱 용기 안, 된장국에 밥을 말아 한 술 뜨면서 생각했다.



여의도의 번듯한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와중에도 외항사 승무원이 하고 싶어 남 모르는 꿈 하나 가슴속에 안고 살던 그 친구에게...'혼자 있는 시간이 안쓰럽고 투병 애가 닳던 어머님'의 죽음은 온전히 슬픔일까. 그 아이 마음 한 켠, 아주 조금이라도, 부담감으로부터 홀가분하다 싶은 마음을 비밀스럽게 갖고 있지 않을까.

 

장례식장을 나오는 길엔 화장실 변기 뚜껑 위에 앉아 주사에 주사액을 주입하고 과배란 유도 주사를 배에 놓았다. 엄마 잃은 슬픔에 어깨 축 쳐진 작은 새 같이 보였던 친구가 애잔해서였을까. 장례식장 화장실 안에서 배주사를 놓고 있는 나 자신이 처연해서였을까.


흐르던 눈물을 씩씩하게 닦으며 길을 나섰다. 3시간 30분 + 1시간. 집에 가는 길이 멀었다.


내 인생 처음이자 가장 멀었던 장례식장 행이었다.

 

하지만 막상 시간을 건너, 그 친구에게 내 아빠의 부고를 알리자니 선뜻 연락처가 눌러지지 않았다.


서울에서 외항사 승무원을 키워드로 만났지만 지금의 우리에게 더 이상 접점이란 건 없어 보였다.



나에게 두바이로 건너갔다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 난임, 임신, 출산, 육아까지 흘러들어온 시간이 있었다면. 친구에겐 여의도에서 아랍에미레이트 샤르자(Sharjah)로, 꿈꾸던 외항사 승무원을 거쳐 다시 서울로. 직장인이자 대학원생인 싱글로 늘 쾌활하고 자유로울 법한 시간들만 흐르는 것 같았다.


다른 시공간 속에 접점을 못 찾던 우리는 간간히 숙제처럼 주고받던 안부 인사마저 잊고 산 지 오래였다.


직접 가지 못해서 미안해.
아버지 잘 보내드려...


친구는 내가 보냈던 것만큼의 조의금을 카카오톡 부의賻儀봉투와 함께, 짤막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경조사 한 번에 인간관계가 정리된다'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10년의 시간 공백을 넘어 알리지도 않은 부고에, 미적미적 찾아와 멋쩍어하며 꽃 한 송이 올리던 남사친 친구가 인간 화환이라도 되는 양 감동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오지 못한 친구가 보내온 메시지 속 (...) 말줄임표 세 개에, 이루 말로 못하는 여러 감정들이 담겨있을 거라 생각하며 대답 없이 '하트'만 꾹 눌렀다.


결단코 서운한 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말로 다 못할 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이제 아니까. 또 다른 시간을 건너 다시 만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두 손을 맞잡고 마냥 반가워할 그런 친구도 있다는 걸 이제 아니까 말이다.


어디서, 어느 자리에 있든. 먼발치에서 누군가 응원해 주는 사람도 있다. 나도, 너도, 응원한다.


그리고 나는 장례식장에서, 그런 사람을 만났다.

무턱대로 나의 시간을 응원해 준 사람.


장례식장, 별 하나 없는 캄캄한 밤하늘 아래에서, 쌍무지개를 만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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