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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Oct 09. 2024

아기띠를 메고 경찰서로 간 자매

1억 사기꾼은 누구인가

퇴직과 동시에 1억이라는 돈을 날리기엔 억울했다. 82년부터 시작해, 퇴직하는 그날까지 한 번도 새 차를 뽑아본 적 없던 아빠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즈음, 아빠에게 새 차라고 소개받았던 차는 중고 남색의 현대 프레스토였다.


더 이백화점 셔틀버스를 타고 주말에 시내 도서관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집에서 종종걸음으로 걷고 또 걸어 송정리역에서 가고도... 완행열차를 또 타고 나서야 할머니 댁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벅찬 우리 집 첫 차였다.



차에 대해 딱히 관심도, 지식도 없던 내게 바퀴가 달린 차가 생겼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저 고무적이었다. 하지만 세탁소 집 아들이라고 불리던 동네 아이 하나 언제부터 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똥차', '똥차'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 그 아이의 '똥차' 노래가 우리 집 차를 겨냥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딱히 타격감이 없었으나... 어느 날 고속도로에서 매캐한 냄새와 연기를 뿜으며 차가 멈추고 나서야, 작은 몸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나서야, 그 노래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우리 집 차가 똥차라는 거였구나!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우리 네 가족 모두 위험에 빠트렸던 그 차는 똥차 중고차였다.


그 이후로도 우리 집엔 근사한 차가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그렌저에서 프린스에 이르기까지, 겉에서 보기엔 제법 반질한 검은색 차였으나 오래된 인조 가죽 시트에서 나는 쿰쿰함이 가시지 않던 그런 중고차들. 우리 집에, 차 운이라곤 없다. 아빠는 늘 직원들이 새 종목으로 갈아타던 시점에, 익절 하던 종목을 고가에 엎어오곤 했던 게다.


그런데, 1억이 통으로 날아가게 생겼다니. 투병 환자가 버킷리스트 삼아, 뚜껑 열리는 스포츠카를 타고 내달려보겠다 해도 크게 이상할 일 없을 시점에!



첫 번째 조카와 두 번째 조카는 6개월 차이. 두 번째 조카와 우리 쌍둥이들은 불과 6일 차이. 고개를 가누고 못 가누는 차이로 분간할 수 있었던 꼬물이들이 넷 찡얼찡얼인 육아 전쟁통이었지만 아기띠라도 메고 나서야 했다. 불의를 참지 못하던 감정형 큰 딸과 예리한 직관형인 셋째 딸이 들끊는 탐정의 피를 바글거리며 나섰다.


어디로 가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만 일단 경찰서를 찍고, 법원 앞 변호사 사무실들을 돌았다. 하지만 어딜 가도 '안타깝지만...'으로 시작해서 '유감스럽습니다만'으로 끝나는 말들만 꺼내놓았고. 늘어난 티를 입고 떡진 머리로 퀭한 눈의 아기 엄마들의 사연에 크게 관심조차 없었다. 소관이 아니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거나 흥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관공서 등에서 도움을 얻기엔 계절 하나를 넘나들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사기꾼 '병'을 소개해준 아빠의 또 다른 지인 '정'아저씨가 간간히 우리들의 사연을 안타까워하며 안부 전화를 주셨다. '정' 아저씨를  통해 알게 된 어느 여성 분 '무'도 사건의 진척 현황에 대해 물어오셨다.



우린 우리 나름대로 '병'의 명함에 나온 정보와 구글 기사 검색 등을 통해 병의 활동 영역 뒤를 캐기 시작했다. 지역 신문의 기사로도 언급되던 그의 사업은 정부 지원은 받지만 허울 좋은 사단법인의 활동인 것으로 드러났다. 기사와 명함으로 소개되는 그는 범인류애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지역 사회에 이바지하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좋은 사람'이었다. 이미지로 먹고사는 그의 활동들을 제지하면서 실제 민낯을 까발려야겠다는 생각에, 댓글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단법인 홈페이지나 밴드 등 SNS 내에 달았던 댓글들은 기가 막히는 타이밍으로 매번 지워졌다. 핑으로 저격 댓글을 날리면 퐁으로 빛삭하는 발빠름이 있었다.  


지나치게 관대하고 다정하면
상대방은 무례해진다.

-쇼펜하우어


그러나 저러나 댓글 전쟁은 지속적으로 펼쳤고 통화 내역 녹음 등을 통해 얻은 정보들을 조합하며 짜 맞추기를 이어갔다. 그 와중에 '정'아저씨와 '무' 여인이 아빠의 건강에 대한 안부와 사건 정황을 물어왔다. 고맙다 싶었다.



사건은 먼저 우리 자매에게 전화를 걸어온 '갑'과 법원 앞 어느 법무사 사무실에서 만나 계약을 파기하면서 끝났다. '갑'은 본인도 계약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며 ''에게 주었던 수수료 명목의 돈을 포기하면서까지 사건을 원점으로 되돌려주겠다했다.


근 한 달 넘게, 육퇴 후에도 충혈된 눈으로 ''의 행적을 좇고 꿈에서조차 그에게 분노하던 차에 다시 받아낸 1억이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엄마에게 물었다.

(우리가 1억 받아낸 셈인데... 포상금 같은 건 없는가?)


우리 자매들의 뒷조사를 크게 신뢰하지 않던 엄마는, 이미 당한 사기를 어찌 되돌리겠냐며 회의적으로 말하던 엄마는 이미 저만치 가고 없었다.


받아낸 1억으로 아빠는 뚜껑 열리는 새 스포츠카를 샀을까? 그러나 저러나, 우리 집엔 새 차 운이 없었다.



입지가 좁아질 대로 좁아진 아빠였지만 리조트 회원권 이야기를 하길래 회원권을 계약하고... 회원권으로 갈 수 있는 국내의 여행지 몇을 대가족이 돌았다.


숙소를 거점 삼아 저녁엔 제철 요리를 해서 나눠먹었고 그다음 날엔 그 지역 맛집을 검색해 온 가족 회식을 했다.


그 계절에 맞는 자연 속에서 다같이 만끽하고 색깔을 찾아 나섰다. 우리 가족들만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러다 다섯 번째 아이가 태어나 백일을 맞이할 무렵, 전 가족이 세부로 여행을 떠났다.


지금 돌이켜보건대, 처음이자 마지막 전 가족 해외여행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면, 그깟 해외여행이든 국내여행이든 자주, 빈번히 떠날 걸 그랬다. 아빠의 이가 약해지기 전에 제철음식을 더 먹을 것을. 다리에 근력이 없어지기 전에 더 떠돌 것을. 산과 육아를 겪고 이렇게 승모근이 발달할 줄 알았다면 바다 앞에, 더 과감해질 것을.


내가 생각하는 생활의 격이란 별 것 아니다.
때맞춰 뜨거운 물에 목욕할 수 있고
갓 구운 빵을 커피와 함께 먹는 것이며.
아침에 가끔씩 모짜르트를 듣고
매일 아침 배달된 신문을 읽는 것이다.
버스를 타도 좋으나 어쩌나 한 번씩은 차를 혼자 모는 것이다.
구겨진 옷이 아니라 깨끗이 다린 옷을 입고
돈은 반듯하게 펴서 지갑에 가지런히 넣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은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어야 하며 가끔씩은 집이 환해지도록 꽃을 사는 것이다.

- 별거 아닌 것을 그리워함, 손영란


P.S. 장례식엔 사기꾼 '병'도 오지 않았지만 각별한 사이였던 '정'아저씨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신원 미상의 여인 '무'도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계약의 당사자 '갑'과 '무'가 동일 인물이었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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