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여희 Oct 07. 2024

장례식장에 오지 않은 사람, 1억 사기꾼

늘 주변에 사람이 많았던 아빠 곁에, 퇴직 후엔 더 각별하게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싸' 남편의 아내로 사는 동안 한 번도 레이더 망을 꺼트린 적이 없던 엄마는 그때 '경고' 알림 버튼눌러댔다.


거짓과 사기로 충만한 인간관계의
유흥, 담소, 쾌락에는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해로움이 숨어 있다.

- 쇼펜하우어


십수 년간 다져진 엄마의 촉은,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남녀를 막론하고 수상한 낌새의 사람을 단박에 감지해 냈다. 이는 고수의 곁에서 어깨너머로 눈치를 몸소 체득한 나와 셋째 딸의 레이더망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자매에겐 학습된 탐정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예리해서 슬프고, 한 치 예상을 비켜나가지 않아 심술이 나던 감각.



직장이나 모임으로 공통분모가 없는데도, 갑작스럽게 등장해 사탕발림 멘트를 날리며 살뜰하게 챙기는 사람.


'형님'과 '존경'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며 오버스러운 배려를 시전 하는 사람.


'굳이', '지금' 물음표를 낳게 하는 뜬금없는 타이밍에도 집에 방문하여 소한 친절을 크게 강조하는 사람.


양복은 차려입었으되 그 반질반질함이 결코 고급스럽지 않고, 명품이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가방은 들었으되 그 손마저도 어딘가 경박한, 하지만 풍채만은 좋아 보이는 사람. 


손에 든 건 텃밭 상추이면서 입으론 산삼이라도 캐논 듯 말주변과 넉살이 좋은 사람.


그 사람이 우리 집과 집 주변을 오간 지 몇 달이 지나고

난 후 아빠는 시골에 보여줄 땅이 있다면서 온 가족을 대동하고 나섰다.



이 땅에서 저 땅 끝을 가리키던 아빠의 손가락엔 뿌듯함이 잔뜩 실려있었는데... 엄마와 우리 세 딸들은 강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의혹은 있으나 섣불리 의심을 내비칠 수 없던 상황. 그러던 어느 날 삼삼오오 모여, 심증들만 소극적으로 쏟아내던 세 명의 여자들을 뒤로한 채 얼마 뒤 아빠는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십수 년간의 공직 생활을, 고위직으로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었을까 싶게... 말이 안 되는 계약서를 가지고 와 내밀던 아빠의 얼굴엔 뿌듯함의 미소만이 면면히 번져있었다.


그제야 '일 그르쳤음'을 인지한 네 여자가 강하게 반발했지만 아빠의 귀는 닫혀있는 듯했다. 이미 입장을 번복할 수 있는 상황에벗어나, 오히려 법의 테두리 안에 갇혀 '반박 불가' 지경이었다. 사기를 당했다.


늘 모든 순간 야무지던 엄마는

아빠가 결정한 일이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우리에겐 네 아이들이 있으니...

 

어쩔 방도가 있겠느냐, 힘없이 말했다.



일은, 늘 야무진 사람의 손 끝에만 달랑달랑 맺히는 법인건지.. 엄마는 며느리 사표를 어렵게 결심하고 시댁에서 발을 뺐지만 가까스로 철모를 쓰고 우리 세 딸의 육아 전선에 함께 뛰어들어야 했다.


세 딸들의 출산과 육아는 6개월 차이로 겹치고 겹쳐, 아이들 울음소리에... 한 때 '난임'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근심의 집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육아전선 속, 엄마의 철모는 삐툴어져있었고, 옷엔 젖내가 가득했다. 침 자국곳곳에 베어 들어있었다.


하지만 사기당한 금액만 어림잡아 1억이었다. 계약 당사자인 갑과 을 사이엔, 형님이라고 살뜰하게 부르며 집을 오가던 병이라는 사기꾼 알선업자가 있었다.


친정집에 모두 네 명의 아이들이 삐약거리고 있었지만 계약서 한 장으로 1억을 잃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자매는, 아기띠를 메고 나섰다.


돈관계 하지마라. 돈도 친구도 전부 잃는다.
돈 빌려 달라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친구를 잃는 일은 적지만
돈을 빌려줌으로써
도리어 친구를 잃기 쉽다.
- 쇼펜하우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