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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Oct 02. 2024

아빠의 암밍아웃. 제가 결혼을 해보겠습니다

결혼에도 스펙이 있다니.

대학 졸업을 앞두고, 방구석 공무원 수험생 생활을 박차고 승무원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준비 없이, 친구 따라갔다가 대한항공 임원 면접과 대한항공 본사를 경험했던 것, 혼자 '운명'임을 직감했던 게 화근이었다.


그동안 '집 떠나면 고생이다.',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서 손해 볼 일 없다.' 주입식 교육받으며 나름 잘 살아왔건만. 어느 날 나는 에 있던 삼익 피아노를 팔고 집을 나갔다. 그때의 엄마와 아빠는 나를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냉랭했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강력하게 내 주장을 피력한 적도 없었고 과감하게 도발을 꾀한 적도 없었만.

엄마, 아빠 인생에 그렇게 단호하게 반대를 말한 적도 없었고 격한 분노를 표현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늘 딸들에게, 존댓말을 써주던 우리 아빠가, 반말로 화를 내다니!)


내가 밝힌 포부 이상의 멋진 사람이 되어 금의환향할 것처럼 패기 있게, 당당하게, 그렇게... 집을 나섰다.



주머니 안에, 중고 피아노 판 돈 85만 원 즈음 들어있던 두둑한 지갑을 연신 조물조물하면서 말이다. 고속버스 안에서 흘리기라도 할까 봐, 대단한 돈이라도 들어있는 양, 주머니에서 지갑을 놓지 않았다. 고시원 비 35만 원은 낼 수 있었지만 서울 승무원 학원비 낼 돈도 없어 당장 스타벅스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할 얄팍한 지갑이란 건 모르고. 그땐 발칙한 나의 서울행이, 두바이로까지 이어지게 될 줄 몰랐다.


숨이 턱 막히도록 더웠지만 대부분의 날이 행복했던 아랍에미레이츠의 두바이에서 지낼 동안 메일로 편지를 주고받았던 건 엄마가 아닌 아빠였다.


아빠에겐 늘 잘 지내고 있으며 내게 두바이가 얼마나 반짝반짝한 도시인지 이야기했다. 호텔에 근무하는 동안 알음알음 승무원 면접도 보고 있다며,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고 세계 각국을 여행할 것처럼 아빠를 안심시켰다. 다른 지원자들보다 높았던 900점 이상의 토익 점수와 토플에서도 나름 높던 에세이 점수, 회화 실력을 우쭐해하며 자신만만, 호기롭게 이야기했다.


외항사 면접은 에세이 등의 영어 시험뿐만 아니라 스몰 토크, Discussion을 거쳐 임원 1:1 심층 면접까지 이어졌다. 늘 심층 면접에서 "See you soon." 인사하고 헤어졌기에 나는 심층면접에서 면접관이 내게 보이던 호의, 친절함, '우리 곧 함께 하게 될 거야' 미래를 약속한 말들을 붙잡고 살았다.




하지만 나는 꿈꾸던 외항사 승무원이 되지 못한 채로, 아빠의 암밍아웃 전화를 받고 집에 돌아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그것뿐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잘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잊어버리려 해도 내 안에는
뭔가 뿌옇게 흐린 공기 덩어리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덩어리는
단순하면서도 뚜렷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상을 이런 말로 바꿔 놓을 수가 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아빠는 폐암 진단을 받고 혼자 수술받으러 아산 병원에 갔다 한다. 그래도 보호자는 있어야 했기에 첫 수술은 엄마가 아닌 막내 작은 아빠가 보호자가 되어 동행했단다. 사코 가족에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하며.


어찌 됐건 난 반짝반짝 빛나던 두바이를 뒤로 한 채, 못다 이룬 꿈은 접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30대의 첫 시작을 맑고 창창한 두바이 하늘에서가 아닌, 전라도 고향 집에서 꾸리게 되다니.



하지만 지금에라도 아픈 아빠를 위한 효도를 시작해야 해야겠다 싶었다. 그때의 좁아진 입지로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유일한 효도는 번듯한 가정을 꾸려 결혼해 알콩달콩 살고 올망졸망 귀여운 손주들을 안겨드려야겠다는 거였다.


아빠의 생각도, 내 계획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집 근처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주말마다 아빠가 주선해 주던 '선'을 봤다. 하지만 번번이 '선'에서 애프터 신청은 받지 못했으며 그건 소개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음먹고 공격적으로 결혼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난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지만
외국물 먹은,
4년제 국립대는 나왔지만
공무원 같은 안정적인 직업군에 속하지 않은,
(그 당시) 예쁘고 날씬하긴 하지만
참해보이는 인상은 아닌,
도도해 보이고 차가워 보이는,
고로 안정된 직업군의 현모양처 타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결혼시장에서 선호하지 않은 타입의 여성이었다. 결혼하기에 스펙이 한참 모자란 결혼 적령기의 여성.



뼈 때리는 팩트는, 결혼정보업체에 나 혼자 상담을 갔을 때 누군가 에둘러해 줬던 말이었다. 이러이러한 연유로, 날 궁지에 몰아넣고서는... 남들보다 더 많은 가입비가 드는 프리미엄 상품을 가입해야 한다며 마케팅 전략을 피력하셨다.


마치 결혼정보업체에 지금이라도 가입(투자), 성공한 결혼으로 20대 때 말아먹은 내 인생을 구원받기라도 해야 할 것처럼. 30대 중반에 들어서만 이런 기회마저도 없이 똥값으로 전락하고 말 것처럼.


결혼정보업체 문을 박살이라도 내고 나올 만큼 속이 울끈불끈 뒤틀렸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들과 갈등을 조장하고 맞설 만큼 딱 부러진 성격도 아니었기에 "잘 알겠습니다." 하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폐암임이 밝혀졌지만 아빠는 한 번도 항암 치료 등에 대해 이야기한 적도, 고된 티를 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아빠가 죽기라도 할 것처럼 조급해했다.


선 > 소개팅 > 연애 > 동호회, 동문 모임


선과 소개팅에서 번번이 실패하고 동호회, 대학교 동문 모임에까지 나서보았지만 귀국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던 시점에 단 한 번도 연애로 이어진 적이 없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평일엔 직장과 요가원을 오가다, 주말엔 영어 과외를 했다. 투잡으로 버는 돈이어도, '화려한 싱글로 사는 비혼주의자'에 화려할 수 없을 지갑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울메이트'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비혼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래도 연말에, 외로울 순 없지... 싶어, 퇴근 후 요가원에 갔다가 동네 단골 이자카야에 들렀다. 남자친구는 없이, 나와 글짓기 대회에 함께 나가던 초등학교 동창 남사친과 풋풋한 24살 여동생과 함께 갔던 자리였다. 그런데 이미 27살의 둘째 동생이, 그녀의 친구들과 테이블을 꾸려 기린 생맥주를 한 잔씩하고 있던 중이었다.


24살의 여동생과 나, 초등학교 동창이 앉았던 테이블과

27살 여동생과 그녀의 동기들 4명이 더 앉아있던 테이블이 어느새 거대한 연말 모임의 현장처럼 넘나들고 있었던 때였다.


말끔하게 생긴 어떤 남자가, 전화번호를 써넣은 유홍준 교수의 책을 30세, 최고령의 여자였던 나에게 전해줬다.


전화번호가 적힌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책을 받은 이후로 만난 연초의 남자는 연말에 우연히 이자카야에서 봤던 남자보다 한층 더 핸섬했다.


결혼할 상대를 만나면 울린다던 그 종이, 내 귓가에 울렸다. 이제야 간절히 원하던 결혼과 효도 의지에 응답을 받는구나. 하지만 몇 번의 데이트 만남 끝에 그는 내게 말했다.


이렇게 결혼 임박의 여성 분이신지 몰랐어요..
저는 당장 결혼 생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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