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한 기사에서, 자녀를 둔 가정의 출근 전 풍경이 남녀 불평등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직장 여성은 출근 전에도 남성보다 같은 시간 대비 많은 일처리를 한다는 거다. 그렇담 지금, 2024년의 풍경은 어떨까. 그리고 1997년은 어땠을까. 일과 가정에서의 역할을 모두 완벽하게 해내려는 여성의 강박은 ‘슈퍼우먼 증후군'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런 강박에서 과연 많은 여성들이 벗어났을까.
엄마는 세 살터울로 출산과 육아를 반복하면서 전업 주부로 살림과 독박육아를 감내했다. 전전후 전 과목 과외교사로, 꿀밤 박아가며 수학을 가르치고 자전거 뒤를 잡아주며 자전거도 가르쳤다. 각각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예민한 여자아이들의 감성을 살뜰히 어루만지며 심리상담가로 활약했다. 짬짬이 배달업과 도서 영업 판매업에 종사하면서 가계 경제에 소소한 보탬이 되고자 했다.
그 와중에 시아버지, 시어머니 회갑연 등을 성공리에 치르는 파티 플래너 역할을 도맡았다. 지대도 고르지 않은 마을 공동 우물터 주변으로, 반질반질한 파란 천막을 쳤다. 시장에서 홍어를 손수 떼어와 홍어 보쌈 묵은지 삼합 등의 홈메이드 음식을 내면서 출장뷔페 요리사를 겸했다.
아빠는 간이 테이블을 돌며 돗자리에 앉아 동네 어르신들에게 술을 따라드리며 독려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할머니, 할아버지는 장남 뒤에 서서 노골적으로 아들 자랑을 내어놓았다.
우리 아들이 효자라...
형형색색 잔치 음식들로 한껏 잔칫상을 꾸린 것은 우리 엄마인데 '차린 것 없지만...'으로 시작하다니. 그리고 '우리 아들이 효자라서 이렇게 대접받는다', 로 마무리되는 이상한 회갑연이라니
회갑연 이후에, 엄마는 고등학생이었던 막내 작은 아빠를 반강제적으로 맡게 되면서 아침 도시락을 싸줬다. 고모의 직장생활이 시작되면서 고모 스타킹까지 빨게 되었다. 고된 하숙집 아줌마 업무까지 도맡으면서 작은 아빠가 먹고 오지 않은 도시락 반찬을 버리며 속상해했다. 하숙집 아줌마 생활은 삼촌이 독립을 하고 고모가 시집을 가게 되면서 끝이 났다. 대신 고모의 결혼식을 도맡아 혼수 마련부터 결혼식까지 주관하게 되면서 웨딩플래너가 되었다
내가 기억나는 것들로만 드문드문 적어도 숨이 가쁠 지경인데, 엄마는 어떻게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역할을 군소리 한번 없이 해냈을까.
그래도 너네 할머니는, 내가 아들을 못 낳았어도 한 번도 싫은 소리 하시진 않으셨어
군소리 대신 애먼 소리를 웅얼거렸을 뿐이다.
객 식구가 떠난 후 엄마는 대학교 2곳을 다녀 늦깎이 대학생으로 졸업했다. 급식 시작 전까지 세 딸들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늘 본인 몫 도시락을 하나 더 쌌다. 대학교 수업이 있는 날엔 대학교 학생식당에서, 수업이 없는 날엔 도서관 구내매점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교사로 일하면서도 나중에 도서관 사서도 할 수 있다며 책 좋아하던 엄마는, 뿌듯해했다. 맞벌이 가정에서 일과 양육, 교육, 가사노동까지... 우리 엄마는 여러 역할을 도맡아 해 내던 그야말로 "슈퍼우먼"이었다.
슈퍼우먼 며느리에게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너네 부부는 모두 연금을 받을 것인께... 재산은 따로 안 물려줘도 되겄지야.
할머니는 질문과 동시에 대답까지 끝냈던 '답정너' 발언 하나 남기시고 재산은 모두 작은 아빠들과 고모에게 물려주셨다.
엄마는 그때도 별 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이 예순이 넘어, 우리가 누군가의 엄마가 되고 며느리가 되자 그간의 속 이야기를 하나 둘 끄집어내면서 분통을 터트렸다.
듣기만 해도 속 터지던 이야기에, 화병이 날 지경이었건만 엄마는... 그때의, 그 시절의 어머니들은 모두들 어떻게 저마다의 슈퍼우먼이 되었었나 싶다. 랩 배틀이 아니라 며느리 분통 배틀을 밤새 쏟아내도 모자랄 지경이었을텐데 화병을 탓하며 본인 가슴만 치며 답답해했을 마음들 대신 등을 살살 만질만질해주고 싶다. 정신과 심리 상담은커녕, 공황 장애, 불안 장애 이런 용어들도 없었을 그 시절, 대체 어떻게들 버티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