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자꾸 연이어 추가 질문을 하시는 분들, 엄마가 오시는 시점에, 다시 오시겠다 말씀하시며... 정확한 귀국 일자와 시각을 물어보시던 분들이 있어 모범답안을 수정하기로 했다.
(엄마는, 독일에 계시지 말입니다...)
(독일에서, 손녀딸 육아 중이라 오시지 못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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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못 오십니다.)
각 가정마다 남들이 모르는 내밀한 사정과 사연이 있기 마련이거늘. 꼭 장례식장에서 배우자가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한다는 법도 없거늘.
또 그러고 보면, 부부의 취향이 온전히 같아야 한다거나, 부부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던가... 꼭 부부라서 늘 함께여야 한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정해진 것도 없지 않을까. 그저 일평생 한 가족관계증명서 속에, 이름을 나란히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 여길만한 일일려나.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설령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한다고 해도." -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오, 지금까지 함께 셨군요!
지금까지 잘 버텨오셨습니다.
일평생 내 마음 같지 않은 타인과 함께 하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시다니.
그 와중에 보석 같은 아이들도 낳고 기르시다니!)
하지만 살다 보니, 완벽하게 데칼코마니처럼 들어맞지 않아도 언제든 서로의 다른 점을 넘실넘실 넘나드며 사는 것.
부부의 취향이 온전히 같지 않아도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고 일단 함께 해보는 것.
거창한 이벤트는 없어도 '고맙다', '미안하다' 짧은 말 한마디와 '고생했소', '덕분이오' 응원과 인정이 담긴 말들이 큰 울림을 주고 함께 살아가게 하는 동력을 얻게 되는 것.
'세상에 완벽한 부부는 없다.'
그럴 일은 없으니 딱 그 정도로도 행운일 것만 같았다. 없는 살림이어도 그 울타리 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대단한 초년 복(初年福)을 누린 셈이고. 부부의 화합과 부모 간의 애정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묵직한 거름이 될 테니.
어쨌든 최근의 경조사, 공식적인 행사 때마다 늘 아빠 곁에 없는 엄마를 의아해하며 수군거렸다. 그런데 하물며, 아빠의 장례식에도 없다...?!
내가 아는 엄마는, 아빠와 40여 년 넘도록 함께 살았지만 내 나이 만 41세가 되도록, 다정한 잉꼬부부의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쇼윈도 부부 행세를 한 적도 없이... 그냥 없었다.
어릴 적의 아빠는 엄마 대신 퇴근길에 간장을 사들며 귀가하고, 종종 엄마 대신 방도 대신 닦아주었지만... 그게 엄마를 향한 애정 표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작고 까맣던 내 발도 같이 닦아주다,
(고양이 세수를 했나요옹) 나에게 코맹맹이 소리를 했을 지언 정 엄마에게 다정한 목소리를 건넨 적은 극히 드물었다.
공무원이 된 이래로, 낮엔 성실한 공무원의 표본이자, 저녁엔 모임계의 인싸 사이를 오갔던 아빠는 늘 바빴다한다. 그 덕분인지, 또래 동기들보다 승진은 빨랐지만 월급봉투를 온전히 가져다준 적이 없었다.
엄마는 새벽녘 우리가 잠든 틈에, 매일 우유를 배달했다. 우유도 배달하고, 우리에게 남는 유제품도 풍족하게 먹일 수 있으니 내심 좋았을 테다. 책을 좋아하던 엄마는 어느 날 계몽사 전집을 팔기 시작했고. 우리들에게 책도 읽히고, 돈도 번다며 내심 뿌듯해했다.
그래도 외식할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포근포근 계란빵을 밥솥인지, 찜기인지 모를 빨간 팬에 구워줬고. 옆집, 윗집, 아랫집 현관문을 열어놓고 자유로이 드나들던 시절, 삼삼오오 모여 엄마표 치킨부터 피자까지 그 시절치곤 제법 다양한 메뉴를 맛 보여줬다. '줄넘기 특강', '롤러스케이트 클래스'까지 다니는 요즘 아이들 이건만 그 시대의 모든 엄마들이 그랬듯 엄마도 대부분의 것들을 '엄마표'로 해결했다.
주말엔 화니 백화점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도서관에 늘 데리고 다녔다. 도서관 매점에서 육개장컵라면이라도 하나 사줬으면 좋으련만, 엄마는 매점에서도 썩 지갑을 열지 않았다. 매점에서 하나 정도 구입하고 야금야금 집에서 싸 온 음식들을 내어먹었던 통에, 행여 매점 아저씨가 핀잔이라도 줄까 봐 어렸던 나는 내심 초조해했다.
엄마는 저학년 때부터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던 초등학생 지갑 속에 토큰 말고는 비상금 1,000원짜리 한 장 넉넉하게 넣어주지 않았다. 나는 하굣길에 연탄불에 노릇노릇 구워 먹는 쥐포를 사 먹고 꾀돌이며, 아폴로를 사서 먹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엄마는 한달에 한 번씩 아빠도 없이 엄마 혼자 종종걸음으로 걷는 세 딸들을 이고 지고, 완행 기차를 타 두 시간 남짓 달려 할머니댁에 데리고 갔었다. 엄마를 잘 따라오라고 무뚝뚝한 말투로 채근하면서도, 기찻길 옆을 거닐며 코스모스 노래를 불러주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회갑연 때마다 할아버지댁 동네 어르신을 불러 모아 손수 만든 음식들로 잔치를 꾸렸고. 엄마가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대접하는 동안, 할머니는 신명 나게, 장구춤을 추고 작은 방에서 잠자다 나온 작은 엄마가 머리를 긁적이며 나왔다.
내 중 고등학생 시절엔, 엄마는 대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굳이, 나와 같은 도서관에 다녔다. 싸 온 도시락을 같이 먹자며 손짓하는 엄마를 가끔 피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
닉스 청바지를 사달라며 뾰루뚱한 딸을 못 이겨NIX급은 아니더라도 TOMBOY 청바지는 사줬고. 한창 공부해야 할 고등학교 1학년 땐 갑자기 합기도를 같이 다니자며 나를 합기도장으로 인도했다. 도복을 입은 엄마와 멀찌감치 떨어져앉아있었어도 모녀 지간이 분명했건만, 난 툴툴거리면서엄마와 종종 합기도를 배우러 다녔다.
세 아이를 키운 시점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임용고시에 합격한 엄마는, 내친김에 대학원까지 다녔고. 엄마는 어느 날 갑자기, 매일 우유 배달 아줌마에서 학교 선생님이 되어있었다.
엄마는 내가 대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보내준답시며 '캐나다 토론토 한 달 살기'를 먼저 하고 돌아왔다. 캐나다 작은 아빠 댁에 날 맡기려고 토론토 살림을 많이 도왔다면서. 무척이나 춥고 일은 많이 했다는데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고 입가에 미소가 배어있었다.
아빠는 그 모든 장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남편으로서의 분량이 적었거나, 하는 역할이 미미해,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모양이었다.
대신 공식적으로는 밤낮으로 업무로 인해 바빴던 아빠지만, 아빠는 늘 세 딸의 일들엔 부리나케 달려와 특별 출연이라는 것을 하는데...
(우리 큰 딸 어서 일어나시지요옹) 매일 아침 존댓말로 깨우는 아빠인가 동시에... 도서관 등에 데리러 오는 기사의 역할이나 21시도 안 된 시점에, 귀가를 재촉하는 집착남의 역할, 친구들과 찜질방 한번 가보고 싶다며 애원하다 도발해 찜질방에서 양머리 하고 귤 까먹던 딸에게, 부재중 전화를 100번쯤 남겼던 스토커 면모가 엿보이는 역할, 대학교 MT를 간다는데 굳이 교수님께 확인 전화까지 해가며 날 부끄럽게 하던 캐릭터였다.
모두들, (너네 아빤 대체 누구시니) 궁금해했다.
아빠는 낡은 검은색 프린스를 굳이 대학교 도서관 앞에 뽀짝 주차해 놓고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초콜릿을 미리 한 박스 사두었다가 하루하루, 작은 손들에 초콜릿을 선물했다. 세 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정다웠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엄마와 함께 나온 장면에, 소품으로 빨간 장미 몇 송이마저 준비한 적 없던 남편이기도 했다.
엄마는, 아빠는, 같은 장면에서가 아닌, 대부분 다른 장면에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
차고 넘치도록 사랑을 받았지만, 남들보다 내밀하게 부부의 사정을 알던 나로선 아직껏 기억하고 싶지 않은 슬픈 장면들도 많이 남아있다. 편집되어 방송되진 않았지만 뇌리엔 깊이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는 그런 장면들. 어린 날의 기억 속이어도 즐거운 추억 못지않게 강렬한 인상으로 박제된 대사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아프고 늙어가면, 대부분 변하기도 한다던데... 남편으로서의 아빠의 캐릭터는 변함없이 일관되게 무심한 남편 역할이었다. 변하지 않아서 야속한 사람 말이다.
<세상의 모든 딸들> 책을 읽으며 엄마의 인생을 닮고 싶지 않다, 생각하며 사춘기를 보냈고. 다정한 아빠이건만, '아빠 같은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을 거야.' 마음먹으며, 'E타입 외향형 호남형'의 남자들은 피하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