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작가 소노 아야코는 그의 책에서 "노인이 되면 경조사에 일일이 가지 말라"라고 충고했다. 경조사에 무리해서 갔다가 다칠 수도 있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신세를 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이에 밀리지 않고 진짜 인생을 살고 싶다는 책을 쓴 가와기타 요시노리는 경조사에 안 가는 것이 검약인지 인색인지 망설이게 된다고 했다. 인색함과 검약의 정의에서 "자신에게 냉정한 것을 검약이라 하고, 타인에게 냉정한 것을 인색이라 한다"는 글에서 말이다.
누군가를 경조사 딜레마에 빠지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고민 끝에, 가족들 간 상의 끝에, 부고 알림 문자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투병으로 인해 퇴직 후 자체 격리하다시피,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만 머물렀던 아빠였다. 하지만 1981년부터 공직 생활을 시작해 3급으로 퇴임했던 아빠는, 공직 생활 이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인싸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사람도, 모임도, 술도 모두 좋아했던 섬세하고 매너 좋은 E타입 호남형.그리고 아비의 딸을 마주한 첫인사로, 종종 "그 양반 참 술 좋아하시지." 당황스러운 피드백을 듣게 했던 술고래.
아빠 핸드폰 연락처에 부고 문자를 복붙 했다가 제한이 걸렸다. 하루 500개 이상의 문자를 보내는데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탓이다. 총 몇 개의 부고문자를 보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온갖 경조사를 다 챙기던_경조사 계에서도 핵인싸이던 아빠에게, 그동안 대부분의 모임을 끊고, 걸려오던 안부 전화를 받지 않던 공백이 길었던 아빠에게, 과연 몇 분이나 마지막 인사를 건네러 오실까... 는 걱정 반, 의구심 반의 의문이 들었다.
장례식장 현황판에 상주로 올라가 있는 인원에 비해, 실제 장례식을 준비할 인원은 반도 되지 않는 상황.
부고 알림 문자가 띄엄띄엄 발송되는 통에 대략 얼마만큼의 조문객이 올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건만...
내 인생, 경조사는커녕 장례식도 처음이었건만.
생각 외로, 장례식 준비와 진행은 분주했다.
조문객들께 예를 갖추다 말고 훌쩍훌쩍 눈물 바람을 하다 말고... 난 자주 호출을 당했다.
도우미로 파견된 60대 이모님 3명은, 일회용 접시 그득그득 홍어며, 보쌈용 고기며, 마른 안주들을 담으시면서 음식을 더 주문할지 말지 여부를 종용했다.
장례식장 상차림의 꽃인, 한껏 삭혀져, 고리고리하던 홍어는 반질반질 자태와 삭은 미를 뽐내며 한 접시에 인원수 상관없이 8점 담겼다. 살코기와 비계의 황금비율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훌륭했던, 야들야들 10점의 보쌈용 고기는 별도의 생김치와 함께 서브되었다. 양념이 푸짐하던 배추김치 빛깔이 쨍했다. 요새 폭염으로 배추값이 3 포기에5만 원이라지...
그럼에도 상당한 양의 음식들이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온갖 일회용품은 '재활용'이라는 단어를 잃은 채, 온갖 쓰레기들이 뒤엉켜 식탁보에 마구잡이로 싸였다.
(정신 차려. 지금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몇 번이고 모르쇠로 일관하다... 40대의 상주인 나는, 가까스로 테이블 당 인원에 맞게 음식을 조절해 달라 말씀드렸다.
(고인 마지막으로 가시는 길, 서운하지 않게 극진하게 모셔야지요.)
그리고 60대 눈썹이 가늘던 이모님께 주옥같은 말을 들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들을 흘낏거리다, 나중엔 영혼 없이 음식 체크란에 추가 (+) 사인을 했다. 마구잡이 음식 낭비와 버려지는 음쓰들과 '극진한 모심'은 무슨 상관일까 싶었지만.
도우미 아줌마들의 빈번한 호출에 불려 가다, 문상오신 손님들을 마주했다.
서울에서 섬 마을에 이르기까지, 멀리서 와주신 분들. 가까이에서 오셨지만 오랫동안 아빠와 공직생활을 함께 하셨던 분들이었다.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거늘.
"○○○에서 국장님, 모셨습니다. 존경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내가 모르는 모습의 아빠를 설명해 주시던 분.
상주들만큼이나 떨리는 손으로 두 번 절을 하시다,
아무 말 없이 가시더니 "슬퍼서, 말이 안 나와."
짧고 굵은 말로 나를 울리시던 분.
비인두암 투병 중인 와중에, 서울 병원에 진료 갔다가
황급히 오는 길이라며 쉰 목소리로 아빠를 추억하시던 분.
"아깝다! ○○○"
마음을 울리던 글씨를 꾹꾹 눌러 담아 아빠 이름 석 자, 쓰고 가시던 분.
조문과는 별도로 "안타까운 마음 이루 말할 길이 없습니다." 메시지를 남겨주신 분.
"존경하는 형님이었는데 갑자기 소식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빠의 아는 동생 분.
여러 분들이 처음 보는 내 손을 잡아주시고, 어린 날의 나를 기억해 주시고, 내 아빠와 함께 했던 추억을 들려주시고. 아빠에게 존경이라는 단어로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존경심을 안겨주셔서. 이토록 아깝고 소중한 우리 아빠를 '아까운 사람'이라고 객관적으로 일러주셔서 도리어 많은 위로를 받았다.실로 그랬다.
적어도 내 기준에 그동안 베풀었던 덕으로, 복을 넘치게 받아야 할 사람. 외롭게 병마와 싸우면서도, 힘든 기색이나 감정적으로 약해지는 것 없이 내적으로 강했던 사람. 내게 너무 고맙고 멋졌던, 우리 아빠. 아까운 사람.
내가 죽을 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회자될까.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 셸리 케이건
먼 길에서, 명절 전임에도, 다른 일들 제쳐두고,
귀한 시간 쪼개어 발걸음 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부고를 잘 알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내 사람들을 그리워했을, 사람 좋아하던 인싸 아빠가 잠시 외롭지 않았겠구나. 그간 아빠가 베푼 정과 마음들이 실속 없는 오지랖만은 아니었구나.
지난날, 아빠는 매번 술자리로 바쁘다며, 공사다망의 아빠에 대해 삐쭉하던 어린아이의 푸념을 넣어 담았다.
내 장례식 때 누군가 와서, 존경이란 단어를 말할 리는 없으니. 이번 생은 글렀고. 미미한 삶이라 할지라도,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보겠노라 다짐했다. 거창하지 않아도, 나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라며.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