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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이야기, 수전으로 시작된 부부싸움(1)

당신의 집, 수전은 안녕하십니까.

by 김여희

수전 水栓, 수돗물을 나오게 하거나 막는 장치.


살다 보니, '수전'을 주제로도 글을 쓰게 될 수도 있구나 싶다. 돌이켜보건대, 우리네 삶 속엔 그게 뭐든 글감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들이 많을 지도. 바야흐로, 나의 주제는 수전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어느 날부터 수전에서 물방울이 똑. 똑. 똑 떨어졌다. 텅 빈 싱크대 위에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똑. 똑. 똑소리는 청아하지도, 영롱하지도 않았다. 그저 묘하게 거슬리는 소리였을 뿐. 혼잣말처럼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계속 물이 새네...)


나의 중얼거림에, 남편은 샤워기 헤드를 돌려주는 수고로움을 자처했다. 허공을 향해 들어 올려진 샤워기 헤드를 타고 물은 졸. 졸. 졸 흘러내렸다. 그리고 똑. 똑. 똑 떨어졌다. 역시나 거슬렸다.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소리에, 남편의 소극적인 대처에 화가 더해져 거슬림은 배가 되었다.


제 짝의 진정한 표시는 완벽한 상보성(相補性)이라는 추상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이다.


내 선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다이소에서 샤워기 헤드를 갈아 끼웠다. 필터까지 장착되어 있어 오염도까지 확인할 수 있다는 새 샤워기 헤드. 3-5천 원이면 고민이 타파되는 다이소가 역시나 똘똘이라니까.


하지만 이번 샤워기 헤드는 수압이 마땅치 않았다. 한번 설거지에, 싱크대를 넘어서 주방 바닥으로까지 물이 튀는 통에... 설거지에, 걸레질의 수고로움까지 더해졌다. 덩달아 나의 짜증 지수가 상승하셨고.



2024년도를 마무리하며, 시부모님과 시누이 내외를 초대해 저녁 모임을 가졌던 어느 저녁. 문제 있는 수전을 예리함과 다정함, 솔선수범의 자세를 장착하신 시댁 아주버님께서 캐치해 내셨다. 한번 손 봐주시기로 하셨지만 모임 저녁에 그런 짬이 없었다며... 모임 후 나와 남편을 초대해 단체 채팅방을 여신 아주버님은 쿠팡에서 수전 링크를 찾아 손수 보내주신 센스를 발휘했다.


(오늘 맛있게 잘 먹고 갑니다. (이 수전) 가성비 좋은 거 같아서.. 설치는 간단하니까 한번 봐줘)


부부 지간에, 사사로운 비교만큼 안 좋은 건 없다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내 남편에게 없는, 다른 집 남편의 장점들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세척기와 로봇청소기에, 세심한 남편의 손길까지 더해진 남의 집 살림도 새삼 부러웠다.


우리는 종종 배우자 앞에서 냉랭하다. 친숙해지면 흥미를 잃듯이 애정이 사라진 탓이라는 설명은 피상적이다. 좀 더 희망적인 해석도 있다. 그 권태감은 배우자에게 상처를 받았거나 화가 났기 때문이고 후련하게 이야기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럴 땐 내적으로 무감각해진다. 사랑에 있어서 우리는 상처받기 쉬운 어린아이와 같다. 배우자가 냉담함을 보일 때 그(그녀)는 굴욕 감 없이, 그 문제를 풀 기회를 찾고 있는 것이다.


매형에게서 링크까지 전달받은 남편은, 당최 움직임이 없었다. 그리고 비교의 마음까지 찾아들어 팔딱팔딱하던 내 마음은, 주문의 의지를 상실했다.


(언제, 고쳐지나 보자.)


수전에서 물이 시작한 건, 이미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남녀평등의 차원에서, 수전 하나쯤 셀프 수리에 나설 수도 있지 않았느냐_할 수도 있겠지만.



밖에서 직장 생활하는 가장의 노고와 고충을 생각해, 평소 음식물 쓰레기나 재활용 쓰레기 투척과 같은 집안일조차 부탁하지 않는 나로선. 집안의 일은 온통 주부의 영역이라는 듯. 수전 하나에 마저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내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 듯한 남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디 한번 두고 보자' 남편은 모르는 공격 태세를 갖추고서 내 눈은 시시때때로 도끼눈이 장착되었다.


아주버님에게서 수전 링크가 전달된 후, 또 한 달의 시간이 흘러... 수전은 똑. 똑. 똑이 아니라 똑똑 똑똑. 똑똑 똑똑.으로 존재감을 드러냈고.


빈 싱크대 볼엔 어느새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진 물방울이 고이고 고여, 언제라도 풍성한 수위의 물로 설거지를 가능케 할 모드가 되었다.


주방 세제를 곧바로 수세미에 묻혀서 설거지할 게 아니라.. 세제 1-2방울에, 물을 1리터는 타야 잔류세제 걱정이 없다던데... 식기 세척기 없이 맨 손으로 설거지해야 하는 나의 설거지 작업 1단계 수고로움을 고장 난 수전이 덜어주는 것인가.


수전도 덜어주려는 나의 수고로움을, 남편은 헤아릴 생각이 없고. 본인의 쇼핑 품목은 잘 검색하면서도, 전달받은 링크를 주문하려는 열정은 없었다.


그러다, 나의 인내심은 위, 아래로 새던 물 앞에서 바닥을 보였다. 샤워기 헤드로 위에서 새던 물은, 온수 호스 사이로 아래로도 새... 싱크대 하부장을 온통 젖게 만들었던 탓이다. 수전을 놓고 혼자만의 자존심 싸움을 벌인 대가는 하부장 곰팡이로 응징받는 것인가.


(이제, 물이 위에서도 새고, 아래에서도 새!!!)


난데없이 아침 일찍, 그간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공복 전, 해독 주스를 갈아주려는데... 남편이 먹고 내놓은 맥주 캔들 유독 걸리적거렸던 탓이다.


맥주캔을 거칠게 재활용 쓰레기통에 분리해 버리며

(하다 하다, 하부장이 물바다가 됐다고!!!!!)


(수전 수리하는 건, 여보나 나나 똑같아. 나도 어차피 유튜브 보고 해야 하는 건 똑같다고. 아침부터 출근하는 사람한테 화내면, 나의 하루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남편의 대답에, 하다 하다 눈물이 났다. 수전 앞에 남녀평등을 운운하는 남편의 대답대로라면, 틀린 말도 아닐진대... 왜 나는 눈물을 후둑 거리고 있었을까. 애초에 혼자 방책을 강구해보지 못했던 전제에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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