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사고 현장까지 고층 빌딩은커녕 이 층집마저도 없이 단출하던 시골 마을. 점심 이후 축구 경기를 하러 갔던 사람들 틈에서 혼자 빠져나와 대파밭에 갔다는 사람. 13시경에서 23시까지, 10시간 동안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행동반경은 3만 평 중 극히 일부. 그동안 켜켜이 쌓아 올렸던 덕행으로 가득 찬 누군가의 일평생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시간은 짐작할 수 없었다. 저체온증이었을까, 과다 출혈이었을까. 빈약한 의학적 지식과 부족한 상상력만으로는 좀체 정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 어둠만 있는 게 아니다.
저녁 바람도, 초승달도 모두 그대 편이다.
-도종환 노을
차갑더라도 겨울해 아래에서 몇 시간, 얼어붙은 밤공기 속, 달 아래에서 몇 시간. 혼자 남겨진 10시간 동안 기적으로라도 온 우주가 편이 되어줘야 했을 그런 사람이었다. 본질 자체가 온기였던 사람. 하지만 외로워도 외롭다 말한 적 없고, 힘들어도 버겁다 말한 적 없던 한없이 착하기만 한 사람을 무심하게도 한순간에 삼켜버린 것이 있었다. 괴물이었다. 하얗게 새어나가는 입김이 가늘어지고 의식이 아득해져 가는 시간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던 괴물.
장례식장에 들어가고, 오열하는 울음소리 틈사이로 수군거리는 소리를 취합하고 나서야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상상 이상의 사고. 이렇게도 허망하게 덕행일치의 사람을 앗아갈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울음을 토해내고 가슴을 내려치는 것뿐이었다.
갑자기 벌어진 엄청난 사고 앞에,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는 것.
무기력하게, 이 처참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죽음을 체념하고 인정해야 하는 일.
그것들은 누군가를 잃었다는 슬픔 그 이상으로 고통을 자아내게 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도 아닌 두 번째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들을 먼저 보낸 슬픔으로 이미 깨져버린 마음. 그 사이로 늘상 눈물이 새어나갔을 사람. 조각조각난 마음을 이 천으로 덧대고 저 바늘을 기워가며 간신히 하루하루 이어 붙여 살고 있었을지 모르는 사람. 그 와중에 자기 힘듦은 내색 못하고 남은 자들을 위해서 온전하지 못하던 마음 한 자락까지도 늘 내어주던 사람. 그렇게도 좋은 분을 이렇게도 한순간에 앗아갈 수 있는 것일까. 통제할 수 없는 영역 밖에서 우리 모두 숙연해졌다.
네이버 캘린더를 열 때마다 '새해맞이 습관 만들기'라는 팝업창을 귀찮아하며 닫는 순간.
아침 명상, 30분 러닝, 금주, 금연, 가계부 쓰기, 야식 안 먹기와 같은... 말도 안 되게 소소한 이 일들을, 새로운 습관 만들기라며 하루 챌린지처럼 받아 드는 이 매일매일. 우리는 매 순간,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 선택지를 부여받는가. 얼마나 많은 기회 속에 살고 있는가.
한 사람이 일생동안 보여준 최선과 희생이 무참하게 녹아내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눴던 마음들이 산산이 부서진 현장에선 울음과 한탄만이 가득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말문을 터야 했습니다.
그럴 때면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에서 구실을 찾았습니다.
- 정채봉, 오세암
그리고 이 잔인한 사고를 원망할 곳도, 탓할 곳도 찾지 못한 장례식장의 모든 이들이 미신의 것들에서 구실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