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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 내게 너무 정겨운 시골집 추억

나의 시골집

by 김여희 11시간전

아이들에게, 주말 때때로 갈 수 있는 시골집이 생겼다. 내 명의의 집도, 남편 명의의 집도 아니었지만 가면 늘 반갑고 정겨움이 있던 시골집. 내 기억 속 어릴 적 시골집과 놀랍도록 흡사한 구도였지만 시골집이라고 하기엔 그곳은 너무도 화려했다.


질펀한 흙 사이로, 듬성듬성 다듬어지지 않은 큰 돌이 깔려있던 언덕길 위로 올라가면 외할머니 집이 보였다. 일자형의 오래된 주택 양 옆으론 가마솥이 외로이 서있었고 곳간으로 씌던 별채가 있었다. 그리고 집 이상으로 존재감을 뽐내던 실외 화장실이 하나. 문을 열기도 전에, 캐한 냄새가 코를 르며 존재감을 드러내던 화장실 긴 널빤지가 두 개 깔려있는 게 전부였다. 얼핏 보기에도 엉성해, 위에 올라서면 여지없이 삐그덕 소리가 났는데... 어린아이가 작은 똥을 누워도 바닥으로 떨어지던 소리만은 철푸덩. 찰지고도 묵직하게 들렸다. 삐그덕 거리던 널빤지 아귀가 잘 맞지 않아 부러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발을 잘못 헛디뎌 저 깊은 구덩이로 빠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들어서기도 전에, 걱정을 자아내던 곳.  한편엔, 천장에서 내려오는 엉성한 전깃줄에 작은 바구니 하나가 매어져 있었다. 가 몇 빠진 바구니 위명조체 큰 글씨가 압도적이던 얇은 달력 종로 화장지를 대신하곤 했다. 우린 "외할머니집에선 왜 화장지를 안 써?" 물음 한번 없이, 요령껏 달력종이를 꾸깃꾸깃거려 화장지와 비슷한 질감으로 만들 궁리만 해댔다. 그리고 어느새 연한 살에, 타격감이 없을 방도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외할머니 집 주변으론 울창한 대나무들 대신 무화과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앵두나무들이 있었다.  무화과를 따서 서둘러 흘러나오던 하얀 진액을 닦고작은 입 안에 쏙. 올망졸망 딱 알맞은 사이즈의 무화과가 작은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썩 달지도 않으면서 아주 물컹거리지도 않던 애매하면서도 적당한 도와 질감의 무화과. 외할머니 댁에서 좀처럼 말이 없던 아빠였지만, 아빠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연신 바빴다.  익은 무화과를 따다, 우리들 입 속에 차례로 넣어주느라. 밤나무, 대추나무, 앵두나무도 무화과만큼은 아니었지만 제각각 시기별로 다른 식감의 재미로, 인사했다. 아빠는 그 나무들 아래에서 제법 남다른 열정을 펼쳤던지라, 외갓집에서 아빠를 생기 돋게 만드는 곳이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신발을 내 벗어던져놓다시피 하고서 안방 아랫목에 펼쳐진 이불 안으로 들어가면 김이 모락모락 군고구마가 한가득 나왔다. 이불을 들춰보면 군고구마의 탄 껍질만큼이나 한 귀퉁이 새까맣게 탄 장판 조각이 보였다. 장판의 안부가 가끔 궁금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고구마에, 귤을 한가득 집어넣고 욕심껏 씹느라 그저 바빴던 겨울. 몇 개 나오지도 않던 채널을 돌려가며 아랫목에서 엉덩이를 지지고 있다 보면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잠이 쏟아져내렸다.


잠든 내 위로 두껍고도 퀴퀴한 냄새가 알싸하던 이불이 덮어졌다. 누가 덮어줬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누구든, 늘 깰까 봐 조심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숨 자고 나면 뜨겁게 데운 물이 한 솥 가득 기다리고 있다가 기꺼이 목욕물이 되어주었다. 팥색보다 조금 연한 빛의 큰 대야 안에서, 우리 세 자매는 동동 뜨는 때들을 건져내며 까르르거렸다. 김장철엔 배추가 절여지기도 하고, 매운 고춧가루에, 짐등짐등한 액젓이 쏟아지며 홍시가 투척되던 양념통이 되기도 하던 거대한 대야 속에서...그땐 미세 플라스틱 걱정도, 전천후(全天候) 대야 투정도, 일절 없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내겐 온통 정겹고 따뜻한 기억들만 서려있던 작은 시골집이었다.


어떤 기억들은 대단하지도 않지만 담대한 힘을 준다. 그렇게 소소하게 쌓이고 쌓인 추억들이, 녹아내리지 않고 켜켜이 쌓여 에너지가 된다. 어쩌다 인생이 힘에 부쳐 휩쓸릴지라도 그 속에서 중심을 잡게 해주는 근간이 되는 그런 힘. 비범하지 않았지만 보잘것없지도 않은 시간들이 시골집 곳곳에서 베어 들어있었다.


내 기억 속 시골집과는 현격하게 다른 아이들의 공간에선 어떤 온도와 질감으로 남을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기존 발행되었던 글을 거제 육아일기 브런치 북에 옮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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