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저는 아주 가끔, 일 년에 한 번 정도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대부분의 일상에서 '쌍둥이 엄마'로 살아갑니다. (...) 제가 지금까지 이뤘던 그 어떤 일보다 '엄마'라는 이름을 얻게 된 순간을 가장 가치 있게, 감사히 여깁니다.
의사 선생님이면서, 작가로 책까지 출간하신 원장님의 북토크에 초대를 받았다. 감히 축사까지 하게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준비해 온 글을 읽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465일이 지난 지금, 나는 거의 대부분 '뛰어다니는 쌍둥이 엄마'다. 전화를 걸고 받는 용도로 개설된다는 소위 말해 '효도폰'이나 '키즈폰'을 사주는 대신, '발로 뛰어다니는 엄마'. 핸드폰을 빌어 몸도, 마음도 편하게 지내는 대신 아이들 사이에서 발로 뛰는 엄마. 온전히 내 선택이었지만 막상 뛰어보니 생각보다 애가 탔고 기대만큼 잘 뛰어지지 않았다. 10대의 육상부 패기는 사라진 지 오래인 40대 쌍둥이 엄마의 뜀박질이란.
대신 아이들 사이에서도 제법 얼굴이 익혀져 등굣길, 하굣길의 '인싸 엄마'가 된 모양 인다... 내 아이들과 함께 걷는 길이 아니더라도 인사하는 작은 손들이 늘었다.
ㅇㅇ엄마시죠? 방금 ㅇㅇ는 이 쪽으로 갔고
ㅇ◇는 저 쪽으로 갔어요.
매번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도 나의 조급함과 다급함을 읽은 모양인지. 묻지도 않은, 센스 있는 정보를 주기도 한다. 알은척하는 눈인사에, 손인사에 찡긋.
하지만 문득 마음 한편이 무거워질 때도 있다. 손에 꼭 쥔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며 걷는 아이들이 아슬아슬하다. 스치듯 지나가는 친구들의 얼굴을 놓치고 아침 등굣길과는 다른 하굣길의 날씨와 풍경을 놓치는 아이들이 아쉽다. 갤럭시 폰을 넘어서 아이폰까지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이 화면 속 안 반짝이고 자극적인 영상 속을 거니는 시간들이 안타까웠다.
쌍둥이들은 자기들에게만 없는 핸드폰을 늘 탐했다. 부러워하고 아쉬워했다. 한 반 20명의 아이들 중 핸드폰이 없는 아이들은 9명 남짓. 전화라도 받아지는 손목시계라도 사줄까 싶다가도... 내 마음은 여전히 저울질 중이었다. 긴급 전화를 넘어, 아이들 손에 쥐어지는 자극적이고 무분별한 정보들이 넘쳐나는 핸드폰 세상.
대신 나는 뛰기로 했다. 정해진 하교 시각에 맞춰서 학교에 마중 나가도 먼저 어딘가로 뛰어나간 아들을 찾아 뛰고. 날마다 갖가지 연유로 느린 걸음으로 나오는 딸을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다가 또 뛴다. 먼저 뛰어간 아들 잡으러.
내 일상 속 달리기에는 발전이라는 이름의 성취도 없고 운동으로서의 대단한 효율도 없다. 아이들의 학교, 학원 스케줄에 맞춰 그 사이를 오가는 달리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내 하루도 50분 단위로 쪼개져 흘러간다. 목적도, 방향도 없이 몸은 바쁘게 움직이는데 나아감은 없어 마음만 조급해지는 달리기.
'엄마'라는 이름을 얻게 된 감격스러운 순간들이 사소로운 일상 속에서 뛰는 동안 자주 잊힌다. 나는 하교 후 서로 다른 방과 후 수업과 학원 수업 스케줄 사이에서 뛰는 엄마. 학원을 덜 보내고, '엄마표'로 수학을 가르쳐보려 하지만 수학 앞에서 작아지던 과거의 나를 마주하며 화를 보태어 내는 엄마. "너 이렇게 하다가 엄마처럼 수포자 되려고 그래!" 울분을 삼키며 새어 나오는 악 속에 자책과 두려움을 싣는 엄마. 여태 수면 분리가 안되어 함께 잠에 들자고 졸라대는 쌍둥이를 거절하지 못하는 엄마. '아직도' 수면 분리가 안되었냐, 타박하며 외국식 양육 문화를 운운하는 누군가에게 '어차피 크고 나면 엄마, 아빠랑 같이 잠도 안 잘 거인데...!' 난 내 품 안에 자식일 때 꼭 끼고 자겠노라
작은 등을 껴안으면서도 자신이 없는 엄마.
대부분의 시간이 이렇게 흘러간다. 발로 뛰는 픽업과 차로 달리는 라이딩 일상 속에서 나는 누군가의 시간을 잇고 메운다. 쉴 틈 없이 움직이는 일상이지만 나는 가치와 감사를 정녕 느끼고 있는 걸까. 기계처럼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나의 욕망은, 열정은 무뎌지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시간일까. 그저 달린다는 느낌 하나로 이유 삼고 버티는 시간일까. 의문이 들었다.
달리다가 문득 글쓰기에서 찾던 위안도 어느새 조용히 주머니 속에 넣어버렸다. 짤막한 순간들 속에서 글짓기로 이어나가던 위로의 조각들이 구겨진 채 담겼다. 출판사에 슬그머니 기획서를 제출했다가도 거절이라는 단어 앞에서 내 위안의 방편들이 꼭꼭 숨겨졌다. 누군가의 평가 앞에서 내 열정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한껏 주눅 들었다. 거창하지도, 문학적으로 대단한 깊이감은 없지만 적어도 내 마음에 진솔하기는 했던 가장 나다운 언어들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매일 거절당해도 주머니 안에 숨어든 작아진 나를 꺼내 달려야 할 텐데.
그런 인생을 옆에서 바라보면-혹은 훨씬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별다른 의미도 없는 더없이 무익한 것으로서, 또는 효율이 좋지 않은 것으로 비쳐진다고 해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그것이 실제로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린 낡은 냄비에 물을 붓는 것 같은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노력했다는 사실이 남는다. 효능이 있든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