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상담에서 알게 된 나란 사람

엄마 마음도 들여다봐야 합니다.

by 김여희

우연한 계기로 혼자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갔다. 실은 남편과 함께 부부 상담을 받고 싶어 신청한 거였다. 하지만 어렴풋이 건넸던 상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거나, 상담이 불필요하다고 느꼈거나,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거나. 그 모든 이유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개인심리상담이 필요할 만큼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쌍둥이 엄마로서, 아내로서, 장녀로서, 며느리로서, 그리고 나로서 가끔 버겁지만, 충분히 잘해오고 있다 여겼으니까. 상담센터에서 건넨 몇 가지 사전 검사에서부터 눈물이 새어 나올 줄은 모르고. 문장완성검사, 몇몇 문장 앞에 멈춰 서서, 답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릴 줄은 모르고.


처음 보는 상담 전문가 앞에서, 철저히 남에게, 내 마음 한 구석을 비추는 일. 우리 가족의 은밀하고도 거대한 사연을 털어놓는 일이 가당키나 하는가. 하지만 낯선 사람이어서 그랬는지, 그 공간이 내 사적인 비밀을 지켜줄 거라 여겼는지, 기대 없이 무방비 상태로 가서 그랬는지. 난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내 안에 오래도록 쌓여 있던 감정들이 하나둘씩 흘러나왔다. 그리고 알았다. 괜찮다고 여겼지만 실은 괜찮지 않을 때도 많았다는 것. 버겁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자주 회피하고 싶어 했다는 것.


내 이야기를 누군가 조용히 들어주는 시간, 고개를 끄덕여주는 작은 반응들 앞에서 내 감정이 존중하고 있구나,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 마음 한 구석을 들여다보는 일이 어렵고 낯설어서 애써 들추지 않았기에... 힘들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30대 초반, 난임 판정을 받고 전국 병원을 전전하며 배에 주사를 맞던 그때였을까. 몇 백만 원어치 배주사가 뱃속으로 분해되어 결국 실패로 돌아오던 순간들. 여러모로 면목이 없던 그때였을까. 몸으로 안고, 발로 지탱하며 두 아이에게 한꺼번에 젖을 물리고, 분유를 주던 그때였을까. 하지만 의외로 그 순간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 시절의 나는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으니까. 기약 없는 시간에 답답했지만 직장도 그만두고, 전국을 떠돌고. ‘그렇게까지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주변의 말림이 있을 정도로 간절하게 굴었으니까.


나는 재작년의 일을 꺼내 들었다. 아이들 등원 준비를 하다 말고,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된 아침. 30대 중반의 동생이 갑자기 쓰러져 119에 실려 갔다는 말에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던 오전. 내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경기도로 넘어가 조카들과 응급실 앞을 서성이다가 기차를 타고 광주로 내려왔던 오후.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던 끝이 보이지 않던 기나긴 여름부터 급격히 상태가 악화된 아빠를 지켜보면서 괴롭고 버겁던 나날들을 꼬박 지나 아빠가 돌아가셨던 다음 해 가을까지.

(그때의 저는, 쌍둥이 엄마이기도, 까다로운 남편의 아내이기도 했지만. 미술심리 수업을 듣는 수강생이기도 하고, 방과 후 수업을 하는 영어 선생님이기도 했었어요. 지금보다 더 많은 걸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버텼었나 싶어요.)


하지만 고단하게 버텼던 그 시간들은, 후회와 아쉬움으로 얼룩져 내 마음을 괴롭혔다. 나는 최선을 다해 아빠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에 여전히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를 인정하고 있었다. 분명 노력했지만 내 노력은 아빠가 평생 나에게 보여줬던 책임과 헌신, 사랑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바쁜 일상과 쏟아지는 역할을 핑계 삼아 나는 자주 도망치고 싶어 했다. 한정된 24시간을 쪼개 쓰는 와중에 아빠를 위해 내어 주는 시간 몇 조각에조차 생색내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SNS가 허락해 주는 나만의 방으로 도망쳤다. 아무 문제도 없이, 좋은 기억들로만 채워지는 방. 그것도 일주일에 1-2번의 도피였건만.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낸 9시부터 16시까지의 시간 동안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 와야 했던 어느 날. 사람들로 북적이던 병원 안에서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아빠를 답답해하던 순간. 서울에서 광주까지 지하철과 기차를 번갈아 타고 가던 길이 멀고도 외롭다 느꼈던 때. 검은 비닐봉지 안에 3개월 치, 1,700만 원의 약을 넣어 오면서 과연 이 약들이 아빠를 살릴 수 있을까 회의감을 내비쳤던 찰나. 하루에 어림잡아도 다섯 끼니를 차려내는데... 잘 먹지 못하던 아빠 너머로 늘 잘 차려먹고 싶어 하는 남편에게 미움이 솟았던 기억. 우리 아빠에게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모자란 며느리 역할에 훈수를 두던 남편에게 화가 들끓던 나날들. 남편과 시댁의 눈치를 살피다, 조카들을 마음만큼 건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이미 내 마음도 아팠던 것을, 서운하다는 말까지 기어코 듣고 나니 종래에는 분에 휩싸였다.

결국 아빠는 돌아가셨고 동생은 병원에서 나와 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갔다. 일상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나 역시 괜찮아졌다 여겼다. 하지만 심리 상담사는 내게 조용히 말했다.


나는 가족 중심적 정서 구조 속, 관계 지향형 사람이다. 관계를 나쁘게 끌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해 누군가에게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일늘 조심스러워한다. 늘 관계 안에서 갈등보다 조율을 택하고 나를 조금씩 뒤로 밀어두며 균형을 맞추려 애쓰는 사람이다.


상담사는 내게 감정을 말로 정리하고 누군가에게 직접 표현하는 훈련, ‘명확한 워딩’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은 인정하고 신경 끄는 연습도 필요하다고 했다. 자책과 후회, 어린 시절의 기억이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했다. 건강과 상실에 대해 불안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다고. 사랑과 책임, 가족을 중심에 둔 삶의 태도가 강하지만 이면에 외로움과 피로감이 강하다고.

나는 늘 타인들 속에서 '역할을 다 하는 나'로 기능했을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익숙해져 정작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 채 그저 역할을 수행하는 나를 대견해했을지도. 내 마음은 외면한 채, 관계 속에서 나만을 지켜왔던 시간들.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다'는 말로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버텼다. 이제는 그 역할들을 잠시 내려놓고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작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나를 어떻게 들여다봐야 하는 지조차 모르고 막연히 '괜찮다'라고 여겼던 마음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쉬움과 후회, 자책이 지금의 감정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도록 해야 했다.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때로는 놓아주는 용기도 배워야 했다.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 결코 이기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 남을 통해 나를 알게 되었던 시간들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심리상담센터 문을 닫고 나왔다.


관계 속에 숨어있던 나를 이제는 꺼내어 나만의 문을 열어나갈 거라는 다짐과 함께.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누구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응원하겠다며. '지금부터는 내가 나를 응원하겠다' 되뇌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붉은 대문의 집에 들어서서 딱 하루만큼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을 맞이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16시부터 12시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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