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여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일곱 살 남동생을 가진 유리는 수영장에서 우연히, 처음 보는 아이와 말을 섞게 되고 그의 가족들을 만나게 된다.
"비 진짜 지겹다, 그렇지? 너도 엄마 기다려?" 비 오는 날 수영 수업이 끝난 후, 데리러 올 엄마가 있는 아이.
"왜 이렇게 늦었어!" 엄마에게 투덜거릴 수 있는 아이.
"이잉, 엄마! 누나가 괴롭혀!"누나와 투닥거릴 수 있는 동생이 있는 아이와 그의 가족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간 유리에게는
"토요일은 아빠 일하는 날이잖아. 유준이 맡길 데도 없고 힘들 것 같은데."
동생과 아빠 등을 이유로 꼭 대회 같은 거 안 나가도 재밌게 수영할 수 있다며 수영대회에 일방적으로 나가지 말라, 설득하는 엄마가 있고 뇌병변 장애로
아픈 동생이 있다.
유리의 마음속에 가시 하나가 삐쭉 솟아났다.
엄마는 늘 그랬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고 싶어 하는지,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유준이 일은 아주 작은 것도 놓치지 않으면서. 유준이에게 주는 관심의 반의반만큼만 신경 써도 알 수 있을 텐데....
-거짓말주의보, 이경아
유준이는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거나 의사소통을 하기 어렵다. 엄마는 물론 가족들 모두가 늘 유준이를 챙겨야 했다. 유리는 유준이를 돌보는 일이 익숙했고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유준이를 보게 되면서... 학교에서 유준이의 장애에 관한 일이 친구들 사이에서 오가면서. 점차 유리는 외톨이가 되어간다.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 계기로 유리는 새로 만나게 된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유리가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할 때마다 불안감과 죄책감으로 괴로웠던 마음이, 거짓말주의보가 울리며 유리를 아찔하게 만든다.
이경아 작가의 '거짓말주의보'는 열한 살 인생에 닥친 통제할 수 없는 가족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가족의 비밀을 굳이 말했다가 타인이 보이는 무례함에, 화가 나기도 하고. 아이 마음에도 자격지심이란 게 깃들어 과민 반응을 하게 된다. 친구들 사이에서 결국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생긴다. 이는 열한 살 아이 입에서도 신세한탄을 쏟아내게 했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분노하게 만들었다. 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 와중에 유리는 수영을 하며 노력해서 끝까지 버텨낼 수 있는, 종래에는 해낼 수 있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이경아 작가님의 거짓말주의보는 그 마음의 벽을 이겨내는 열한 살 유리의 이야기, 유리의 성장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다양한 관계 속에서 갈등하는 모든 아이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것이 하나쯤 있다. 둘, 셋 일 수도 있다. 유리처럼 의도치 않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거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가족 이슈가 될 수도 있다. 꽁꽁 싸 메어 들키고 싶지 않은 일. 누군가 묻거든 얼렁뚱땅 대답을 회피하게 되는 일. 그것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겼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통제할 수 있으니, 회피를 이유로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사적인 영역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자격지심에, 공연히 내 이야기가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어서... 등등 여러 이유에 의해 숨기기로, 얼버무리기로 어렵게 결정한 것이 때로 파고 드나들려 하는 타인에 의해 거짓말이 되기도 한다. 아무 문제도 아닌 듯 호연하게 살다 보면... 거짓말이라도 쳐서 벗어나고 싶던 상황들이 별거 아닌 듯 툭툭 털어질까 싶은 마음에, 무장한 거 일수도.
이것은 모두 나도 모르게 할 수 있는, 알면서도 할 수 있는, 내 모든 거짓말에 대한 핑계이지만.
하루 중 좋았던 일만 고르고 골라서 쓰는 듯한 아이의 해맑은 일기 속에서 위안을 받을 때가 많다. 내 불행의 보자기는 감춘 채 나도 SNS에 좋고 좋은 것들만 올려 위장할 때도 많다.
세상에 슬픔은 얼마나 많은가. 내 슬픔은 얼마나 작은가.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알고 나면 내 슬픔이 작게 느껴진다지만. 굳이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뭐 하러 캐내어 알 것이며. 그것으로 위안 삼을 일인가 싶다. 의외로 그렇게 심술궂은 사람들이 많지만 말이다. 굳이 다른 이의 행복을 나의 그것과 비교해 가며 새어드는 자격지심과 질투심을 포장할 일인가도 싶다. 더 나아가 폄하하고 종래에는 측은지심으로 남을 판단 내릴 일인가.
거짓말주의보로 시작했다가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지 않고 얼레벌레 얼버무리게 되는 까닭은.
오늘 내가 천연덕스럽게 모르는 척했던 상황이 있었던 탓이다. 거짓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는 척하지도 않고 공감하지도 않았다. 모르는 척, 내 일은 아닌 척했다. 그리고 실은 우리의 일은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고 오히려 '다행이다' 속으로 위안까지 삼았다. 그런 불행은 없었다는 듯. 남 앞에서 열지 않는 불행 보자기는 불행이 아닐 수 있다. 행복만 열어대면 종래에는 해피엔딩으로 꽉 채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언어가 의식을 바꾸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모국어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대로 존재한다.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는가, 무엇을 듣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듣는가, 무엇을 느끼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는가가 우리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
무엇을 어떻게 듣는가.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가.
그래서 거짓말주의보를 발령 중인가.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