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되는채취 실패속 은밀한 제안

난자공여라니요...

by 김여희

점점 채워져 가는 퍼즐판? 부산에서의 첫 시험관 시술을 시작으로, 광주, 대구에서의 과배란 시도를 거쳐 서울의 자연주기에 이르기까지... 난 퍼즐판에 얼마나 많은 퍼즐들을 채워 넣었을까? “Life is like a puzzle.” 인생은 퍼즐과 같다지만 난임 일상은 1000 pcs짜리 퍼즐 박스처럼 친절하지만은 않았다.


퍼즐은 맞는 조각들을 찾아_ 헤매는 순간에도 줄 듯, 안 줄 듯 썸을 타다가 어느 순간 ‘톡’하고 한 조각을 내어놓기도 한다. 한 지점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면 다른 퍼즐 조각들을 찾아 새로운 구역의 조각들을 다시 맞추면 된다.






하지만 #시험관시술 을 진행하는 동안 가속도를 내며 퍼즐을 맞춰본 적이 없었다. ‘퍼즐 박스처럼, 전체적인 그림을 ‘선 제시’하는 게 어때?‘ 네고하자고, 제안하고 싶었지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던 내 난임 일기의 퍼즐판. 안 그래도 더딘 속도에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난임 < 시험관 시술 < 과배란 시도 < 난소 기능 저하 < 자연주의 시도 < 저반응군 이렇게 요약되는 결과지 앞에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애써 채워왔던 퍼즐판을 흩트려 뜨리고 싶어졌다. 아니, 퍼즐판을 엎어버리고 싶었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 왕복 8시간의 시간을 흘리고 찾아온 서울 저자극 전문 난임 병원에서.


어떤 퍼즐판이 완성될지 모르기에 더 흥미진진한 거 아니냐고 말하는 무심한 누군가가 있으려나? 그런 무책임한 희망은 나에겐 비수였을 뿐이다. 내 #난임 퍼즐판에선 완성 그림을 선 제시하기는커녕 결말이 어떻게 될 거라는 복선조차 내밀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어찌어찌, 또 다른 ’ 난자 채취의 날‘이 서울 병원에서도 오긴 왔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난자 하나, #난포 하나에 이렇게 민감해질 줄 몰랐는데...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있으려니 온 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긴장감이 엄습해왔다. 초음파로 채취할 난포의 위치를 확인했다, 초음파 기기와 함께 가느다랗고 긴 바늘 침을 넣었다. 채취할 난자 양이 많은 분들은 수면마취를 진행한다고 했다. 채취할 개수가 적은 난, 그냥 맨 정신이었다. 바늘 침으로, 난포 안에 있는 일종의 체액과 함께 난자를 얻는, 겨우 수 분의 시간. 따끔따끔,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채취를 마치고 30분 정도 누워있다 다시 탈의실로 돌아갔다. 채취 전, 긴장 모드에선 안보였던 아늑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진료실 한 켠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남편의 모습도. 그는 늘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부쩍 데리고 나오는 친구들 모임에서, 마음 한 켠 서운한 감정이 들었을 텐데도. 오히려 무덤덤한 척,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던 남편이었다. ‘여보 일어나.’ 무심하게 한 마디 던져 남편을 깨웠다. ‘여보, 미안해. 여보가 고생이 많다.’ 목까지 차오르던 말이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총 944,140원의 영수증이 뒤따랐다. 진료비 영수증 보고 다시 한번 후들후들. 병원 진료 두 번이면 명품 가방을 하나 사겠구나. 싸우자.






채취 후 일주일간의 기다림 끝에 들은 대답은 예상대로 시시했다. #미성숙난자 로 인한 #난자채취 실패였다. 다시 #공난포 . 난자가 미성숙했다는 건 일반 체세포의 2배 염색체인 4n = 92의 DNA를 가진 난자로....... 블라블라. 난자 자체의 크기가 작고 주위에 붙어있는 과립막 세포도 작아 매우 딱딱한 상태이며, 현미경 수정을 통해서도 수정이 되지 않는 난자........(블라블라)


그냥 실패였다. 이과적으로, 문과적으로 아무리 긍정적으로 해석을 해보려고 해도 답은 그냥, 실패. 전화로 결과를 통보받고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못 했다. 눈물만 후둑후둑 흘리는 중이었다. 차근차근 위로해주는 말들 너머로, 난감함이 느껴졌다. 몇 번을 더 해야 마음이 단단해질까. #과배란 에 이어, #저자극 , #자연주기 까지 넘나드는 적극적인 난임 치료로 대응했는데... 이식은커녕, 난자 채취에서마저도 실패의 역사만을 남기고 여름이 끝난 셈이었다. 따질 힘도 없었다.







서울 병원의 문은, 충격적인 물음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저자극 시술이라, 다른 여느 때보다 더 빈번하게, 어려운 걸음으로 갔던 병원이었는데...


“혹시 자매가 있으신가요?”


아무것도 아닐 그 질문을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에 역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래로, 자매가 둘 있어요.’ 이 일상의 대화에, 의사 선생님은 갑자기 ‘다행이네요.’ 말했다.


자매가 있다는 것, 그것도 아래로 두 명의 자매가 있다는 것이 어떤 이유로 다행인 걸까.


"이렇게 난자 채취가 어려운 경우, 부득이한 경우에는

자매들로부터 난자를 공여받기도 합니다..."


그날, 남편은 시험관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 목소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난자 공여라고요?"


남편의 코 끝이 빨개졌다. 진료실엔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려는 듯 목을 가다듬는 남편의 소리와 의사 선생님의, 침을 꿀꺽하는 의사 선생님의 소리만 들렸다. 적막이 흘렀다. 난자 공여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제안이었다. 남편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내 손을 잡고서 담담히 진료실을 나왔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린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흔한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저녁 즈음 소주 한 잔을 들이켜고 나서야 그동안 말이 없었던 남편은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화가 났노라 고백했다. 아이를 안 낳았으면 안 낳았지, 그렇게는 안 하겠노라고. 새삼 이 남자에게 미안해졌다.


그 날밤, 남편에게 부쩍 말이 없던 나였지만 아이 없이 살자는 남편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솔직한 심경으론 난 아이를 낳고 싶었다. 자매들에게 난자 공여 제안에 대한 소식을 전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가십처럼이나 가볍게 웃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분노하듯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심 자매들에게서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 살피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이미 #난자공여 에 대한 검색도 끝마친 뒤였는데 그때의 난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난자 공여 프로그램은 난자 기증자에게 난자를 제공받아 남편의 정자와 결합시켜 체외 수정을 진행된다고 한다. 난자 공여자 역시 타인에게 난자를 제공하기 위해서 과배란 유도 시술을 받아야 하는 셈이었다. 그 후 부인의 자궁에 수정란 (배아)를 이식하고 부인이 스스로 임신 출산의 과정을 거쳐 자녀를 낳는 거라는데! 윤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런 프로그램을 검색하던 나와, 한편으로 자매의 과배란 시도 과정을 상상해보는 나 사이에서 실소가 나왔다. 그래서 난, 퍼즐판을 엎어버렸을까?







10월, 병원을 또 옮겼다.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시험관 시술을 위해 처음 부산대 병원을 찾았던 게 1년 전 10월 말이었으니 딱 1년이 지났다. 내 일상에, 시험관 시술이라는 낯선 단어가 본격적으로 들어선 지. 어떤 이들은, ‘고작 1년 가지고 무슨 넋두리냐’ 할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난소기능저하 로 한 달 한 달, 애를 써도 난자 1개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나로선 그 1년이 빼곡하게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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