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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Oct 06. 2021

봄날의 이식

위풍당당 부부싸움

“당신은 어떻습니까? 계절이 어떻게 돌아가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관심을 기울여본 적 있나요? 혹시 모든 계절이 비슷하다고, 일상이 너무 지루하다고 불평만 늘어놓으면서, 당신 앞에 놓인 시간과 계절을 덧없이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셨으면 해요.” 

_마음의 주인, 이기주 작가


그랬다. 뜬금없이 내 인생에 발을 들인 난임이라는 녀석을 들인 이후부터다. 흘러가는 계절에 눈물이 한숨이 새어들고 후둑후둑 떨어지는 그 흔한 빗방울에마저 눈물이 나기 시작했던 것은. 맥을 못 추는 난소 기능 저하 수치 앞에, 언제 끝날지 모를 난임 병원 할부의 덫에, 종종 잠 못 드는 밤으로 지새우기 시작했던 것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렇게 또 시간만 보내는구나...’ 계절이 열어주는 새로운 챕터가 언제부턴가 설레지 않았었다. 또 다른 봄을 맞이한 나는, 찌듦을 걷어내지 못한 채, 그렇게 척박한 겨울의 한가운데 서있었다.      







봄. 수정란을 더 모을 것인지, 아님 이식을 진행해볼 것인지 결정의 기로에 섰다. 일단 4개 수정란 중, 2개를 해동하여 배아 이식 수술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식이라고 해봤자, 처음 난임 병원을 밟았던 이후 두 번째였다. 워낙 힘들게 모은 귀한 수정란이다 보니 이 한 번의 이식을 결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성공에의 희망보다 실패하면 어쩌지, 두려움이 앞섰다. ‘수정란이 2개나 남아있잖아’ 하는 긍정적인 생각보다 다시 수정란을 모아야 한다는 막막함이 먼저 앞섰다. 실패를 전제로 한 이식에 나서 보기로 했다. 애초에 기대가 없어야, 실망도 덜한 법이라며.     


밥 먹고 화장실 갈 때 빼고는 시체처럼 누워있었던 1차 이식 수술 때와는 달리 2차 땐 무던하게 일상생활을 하기로 했다. 이 역시, 전략이라면 전략이었다. 다수의 난임 카페를 떠돌며 이식 경험담 자락을 모아 모아 어렵게 짠 전략. 여느 때의 일상 스케줄을 소화해내었다. 그러나 보통날보다 더 잘 먹고 잘 자려고, 더 즐거워보려고 애를 쓰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달간의 노력의 결실이 이번 이식 결과에 달려있었다. 빛을 보느냐, 마느냐. 난포를 키우기 위해 시시때때로 걸었던 산책길 위에서 얻은 에너지와 마음을 다스리려 갔던 절에 얹고 왔던 수많은 돌들에서 얻은 기운, 체질 개선하려 밀가루 음식 대신 보양식 한식으로 채워 넣은 영양들... 여기저기 뿌려놓은 점들이 의미 있게 이어져 별이 될는지.    


이식 기간 동안 일상생활을 하겠노라고 했지만 마음은 살얼음판을 걷듯, 긴장감 속을 거닐었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다. 몇 개월, 근 1년간의 노력이 이식기간 일주일 동안 좌지우지되는 셈이었으니. 티를 내기엔 행여 부담이라도 줄까 봐 애매하고, 티를 안내기엔 무관심해 보일까 봐 난처한 상황이었을 테다. 그건 친정 식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서로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피검사를 앞둔 2-3일 전, 마침내 일이 터지고 말았다. 1차 이식 때 실패를 안겨줬던 갈색 혈이 팬티에 묻어 나온 것이다. 화장실에서 심장이 멎는 듯,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실수로 살짝 베어 손 끝에서 붉은 피를 봐도 쓰라릴 일인데...    

 

'이 피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착상혈일까, 생리혈일까.'     


1차 이식 때보다 일상생활을 하긴 했지만 무리하진 않았었는데... 무심코 흘린 피에, 여러 생각들이 무한히 오고 갔다. 그래 봤자 ‘불안, 초조, 두려움, 공포.’ 온통 부정적인 에너지들로 응축된 생각들이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 불현듯 남편의 사소한 잔소리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잔소리라니. 기막힌 타이밍에, 난데없이 날아든 몇 방울 피와 잔소리 폭격이었다. 반사적으로, 분노 버튼이 발사됐다. 영화 킹스맨에서 연달아 터지던 폭죽처럼 분노 버튼 하나로 폭죽들이 뻥뻥 뻥 터졌다. 이에 질 세라 신랑은 1년간 응어리져있던 마음을 수류탄 투하로 터트렸다.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집안의 집기들이 하나씩 내던져졌다.


 ‘너만 던지냐, 나도 던질 수 있다’ 


결혼 이후 처음으로 살림살이들이 깨져나갔다. 거실장 한 켠의 유리가 깨져나갔고 테이블 위 유리가 터지면서 거실 천장에 생채기를 남겼다. 폭죽은 하나, 둘 터지기 시작하더니 비단 시험관 이슈에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팬티에 묻은 한 점의 혈이 우리 결혼 생활의 근간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 하던 찰나에 피는 다른 곳에서 또다시 터졌다. 남편은 거실장 깨진 유리에, 발을 다치고서 선홍빛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위풍당당 행진곡과 폭죽 행렬이 멈추었다. 그 피에 놀라, 갑자기 들던 정신으로 ‘여보 괜찮아?!’ 서로에게 물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뚝뚝 떨어지던 피 사이로 온 집안이 폐허였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산산조각 난 유리조각들로 빛이 나던 거실 바닥을 분홍 고무장갑을 끼고서 한참 동안 쓸어 담았다. 부부싸움은 그렇게 끝이 났고 다음날 있을 병원 피검사는 가지 않기로 했다. 이혼도장 찍으러 법원에 가겠노라며 서류 타령이었다. 유리조각들은 다 거둬졌으나 우리들의 흥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또다시 밤을 지새웠다. 찬란한 봄날의 어느 밤을 눈물과 한숨으로.     







피검사 당일, 건방진 이식 환자는 병원에 전화를 걸어 당돌하게 물었다.     


“오늘 피검사 날인데, 이미 생리혈을 봤어요. 오늘 그냥 병원 안 가려고요.”   

  

질문도 아닌 통보였다. 전 날의 격한 부부싸움으로 결혼 생활마저 뿌리째 뒤흔들리자 마음까지 너덜너덜 모드였던 것이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결과를 기록해야 하니 꼭 내원해야 한다고 했다. 초탈한 마음으로, 피를 뽑고선 ‘검사 결과, 오후에 전화로 결과 확인’ 안내는 귓등으로 흘리고선 밖을 나왔다. 화장실에서 봤던 피로 이미 산산조각 난 마음에, 부부싸움으로 영혼까지 너덜너덜해지고 나니 이제 허탈함의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젯밤 우린 그간 신중하게 맞춰왔던 퍼즐판을 뒤 짚어 엎다 못해 찢어버렸다.     


걸음이 느린 아이 때문에 지나가는 유모차를 피해, 놀이터에서 삼삼오오 모여있는 엄마들의 눈길을 피해, 죄인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넉넉지 않은 신혼살림에, 매번 큰 액수의 돈을 쏟아부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밑 빠진 독이었다. 언제까지 예민한 사람, 눈치 보며 살얼음판을 같이 걷자_남편에게도 못할 노릇이었다.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서로를 위해서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일렁였다. 임신 이슈를 떠나, ‘우리 서로에게 플러스가 되는 결혼일까’ 엉뚱한 데까지 폭죽의 파편이 뻗쳐있었다. 정말 아이 갖으려다 이혼할 각이었다. 그러던 찰나,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3월 17일 피검사 결과 B-HCG 236입니다.      


1차 이식 결과 0.1 숫자만 기억하던 내게, 뭔지 몰라도 236이라는 숫자는 희망적이었다. ‘성공했네요. 피검사 수치가 2배나 높아요.’ 성공이라는 말에, 피검사 수치가 2배라는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수치고 뭐고 일단 성공이면 그것으로 된 것이었다. 그리고 3월 22일 수치 643, 태낭까지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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