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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Oct 28. 2021

우리 집에 영재가 삽니다.

육아를 하다 보니 호들갑스러워졌다. 아이가 보이는 사소한 행동에, 유난스러운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런데 그건 우리 집에만 있는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저마다 "우리 집에 영재가 삽니다." 환호했다. 5세 때 한글을 뗐고 기분을 angry 영어로 말할 줄 안단다. 숫자는 십의 자리도 척척 세알 릴 수 있으며 책을 놓을 줄 모른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아쉽게도, 우리 쌍둥이들은 영재 기운을 보이진 않았다. 그저, 월령에 맞게 잘 자라고 있음에 대견스러워하는 중이다. 그래도 한 발 한 발 걸음마를 뗄 때, 그 한 발자국에 물개 박수를 치고 TV 앞에서 추는 춤 앞에, 나중에 커서 아이돌이 되려나... 중얼거렸다. 자석 큐브 블록으로 생각보다 꽤 멋진 집을 만들어낸 것에 흐뭇해하고 크레파스로 끄적거린 그림 한 장을, 여러 지인들에게 자랑했다. 나에게 주옥같은 영상들이, 남에겐 예의상 칭찬을 해줘야 할 숙제처럼 남았겠지만! 부모들은 저마다 꿈을 꾼다. 아이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장래희망에의 가능성을 읽는다. 어느 날은, 건축가가 되었다가 어느 날은 의사가 된다. 어느 날은 아나운서가 되고 또 어느 날은 사장님이 된다. 아이를 부모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태우고 달린다.

 





내가 어렸을 적, 우리 엄마 아빠도 그렇게 야단스러웠을까 생각해봤다.엄마, 아빠는 어린 나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내 안에 내재돼있는 가능성에 어떤 꿈을 꾸었을까.  내 기억 속,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어떤 대학을 가야 한다,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한다... 로드맵을 제시하지 않았었다. 학원엘 안 다닌 건 아니었지만 여느 일반 가정집에서 보낼만한 보통의 수업들이었다. 학교에 치맛바람 한번 나부낀 적이 없었다. 학군과 상관없이 월세 상하방에서 15평짜리 주공아파트로, 30평짜리 직원 아파트로 이사했다. 수능날, 색깔 바랜 배냇저고리를 수줍게 가방 한편에 넣어줬지만, 어느 대학에 붙어야 한다고 응원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아쉽게도 난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적어도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의 범주 안의 사람 말이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에게도 섣불리, 어떤 대학을 갔으면 좋겠다, 어떤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 바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기대감에 부풀어 내미는 그 한 마디가, 실망에의 두려움을 자아낼까 싶어서다. 무심코 던진 격한 응원에, 간간히 맛보는 실패를 면목없어할까 싶어서다. 부담스러운 기대와 응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도 나에겐 스스로 옭아매었던 시간들이 길었다. 꿈을 꾸는 게 누군가에겐 헛바람처럼 보이고 자리를 못 잡은 것이 누군가에겐 변변치 못함으로 보일까 봐 걱정하던 시간들이 많았다. 그 시간 동안 한참,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다양한 국적의, 직업군의, 배경의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의사도, 파일럿도 아니었다. 오만의 바닷가 마을에서 살던 영국인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의 오만 무스카트 라이프, 바닷가 마을에서의 자급자족 삼시세끼.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이름마저 거창한 나라, 영국인이 왜 영국 국적을 버리고 오만 국적을 취득해서 살고 있냐, 누군가는 예의없는 물음을 던질 테다.  작은 2층 집, 고래가 보이는 whale watching room에서 고래를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을 테다. 무스캇 바다 마을 어귀, 담벼락에 남기는 자취들이, 그간 해왔던 예술의 범주에 드는 거냐고 감히 판단할 수도. 지나가는 남의 집 아이를 보면서도 찰나 동안 몇십 마디를 꺼내고 뒷담화를 나눌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의 오지랖이라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물음들이다. 하지만 염소떼를 지나 바닷가를 지나서야만 갈 수 있는 작은 마을에, 하얀 2층 집을 짓고사는 심플라이프.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오만 전통 모자 쿠피야를 만들다가, 천천히 예멘 커피를 내려마시는 영국인 할아버지의 오만인 일상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 평화로워 보였다. 행복감이 느껴졌다. 





살다 보면, 남들 눈에 무모한 도전의 끝이 금의환향이 아닌 남루한 회귀로 끝날 수도 있다. 넘는 인생의 고개고개마다 실패를 맛볼 수도 있다. 주변에의 시선이나 말 한마디에 휘둘릴 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 없이 꿈꾸라고 말하고 싶다. 실패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일 앞에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용기가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 위에서 발휘되는 진취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계절이 주는 매력을, 소소한 변화를 관찰할 줄 알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즐거운 이벤트거리를 찾아내는 재주를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찾은, 나에게 맞는 행복 앞에 당당하면 좋겠다.


아이들의 외할머니는 어느 날,  이렇게 편지를 썼다. 혼자 제주도를 여행하는 동안 손주들이 그리워서 쓴 모양이었다. 


To. 다섯 명의 강아지 

보고 싶다.

날마다 행복한 여행을 누리며 너희를 그리워해.


건강하거라.

행복하거라.

항상 정의롭고 씩씩하며

고결함을 지키려 노력하거라.


사랑한다.


할므니. 





한 번도 나에게, 내 자매들에게 무엇이 되거라, 어떻게 살거라_ 말한 적은 없지만

어린 날의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편지를 썼을지 모를 일이었다. 할므니이자 엄마의 짤막하면서도 울림이 깊던 글을 읽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건강하게, 행복하게, 적당히 정의롭게 살고 있다. 

고결함을 지키려 노력하는 중이다...)


한 번도 호들갑스러운 칭찬을 엄마에게서 들어본 적 없지만

그것으로 됐다고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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