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이 뭐라고.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소란스러운 2021년 연말을 보냈다는 핑계로 이번엔 2022년 새해 다짐에 대해서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작심삼일로 끝날, 그런 계획이라면 아예 세우지도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버린 걸까. 하지만 막상 이전의 새해 다짐에 대한 기록들을 들춰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꼭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마음에 염두한 일들이, 지근거리에라도 닿아있었던 거다. 비슷한 방향에라도 이르게 해 줬거나... 머릿속에서 한없이 곱씹던 과제들이 미미하게나마 성과물로 토해져 나왔다. 아닌 게 아니라, 재작년 새해 다짐들을 들춰보니, 더 명확했다. 그렇게도 바라던,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긴 내었구나...! 그로써 도서관 한편, 한 권만큼의 지분을 얻었다! (다만, 몇 곳이라도) 그 일은, 강남 한 평 땅만큼의 가치는 아니더라도 내게 그 이상의 가치였다. 몇십 년을 곱씹었는데 재작년에서야 '베스트셀러는 아닌 그런 책'으로 토해져 나온 소중한 내 책.
작년엔 칼럼을 썼다. 칼럼을 쓰면서 문득 생각이 났다. 대학 때 교수와 아주 형식적인 상담을 하면서 "칼럼도 쓰고 싶어요."라고 말했다가 비웃음을 샀던 십수 년 전의 기억 말이다. 교수님은 대놓고 비웃진 않으셨지만 두루뭉술한 그 이야기에,
(대체 네가 뭘, 언제, 어떻게...?)
6하 원칙에 맞게, 의구심을 품은 표정이 역력하셨다. 나로선 공무원이나 공사 취업 말고 실은 딱히 꿈이나 목표라는 게 없던 시절이었다. 왜 그런 대답이 나왔는지 나 역시도 모를 일이었지만, 교수님의 반응이 너무도 명확해서 당황했다. 여태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당황함을 넘어서 모멸감을 느꼈던 걸까.
(교수님, 그래도 칼럼이란 걸_ 쓰긴 썼네요. 누가, 읽을까 싶은 그런 칼럼이었지만 말이에요.)
다짐했었다. 칼럼을 다 쓰고 나면 그 돈으로 '샤넬'을 하나 들이겠다고. 지극히 물질적이면서도, 우습기도 할 작년의 목표 중 하나였다. 아주 오래전, 민망함을 느껴가면서까지 말했던 내 목표 중 하나를 이룬 그 돈으로 샤넬을 사겠다니...! 하지만 어찌 됐건 여태 이루지 못했다.
결혼 후 살림을 시작한 나는, 출산 후 육아를 시작한 나는, 나를 위한 돈을 잘 쓰지 못했다. 아니, 못하게 됐다. 내 물건보다, 남편보다... 아이들 육아용품이 최우선이었다. 늘어진 바지를 입고 안경을 쓰고 마스크를 두른 나에게 쇼핑이란 멀고 먼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이왕 하는 쇼핑이라면 소소한 쿠폰들을 모조리 끌고 끌어, 최대한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맘 카페에 보면, 간혹 같은 물품인데도 ‘어쩜 저 아름다운 가격에 득템 할 수 있었지?’ 놀라운 능력을 선보이시는 분들이 있던데... 아쉽게도 지극히 아날로그 성향의 나에겐 그 일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못 할 바엔, 시도도 하지 않겠다는 심산이 종종 발동했다. 하여, 나의 친절한 육아 동지들이 공유해주는 링크가 없는 한_ 꼭 필요한 아이들 육아용품이 아닌 이상_쇼핑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다 칼럼을 쓴 돈을 받으면 '그 돈으론 오롯이 내 걸 살 거야!' 했던 건데... 그 결심의 중심에 왜 하필 샤넬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여느 기혼자들에게 샤넬은 다른 브랜드보다 큰 의미가 있는 듯 한 건 분명했다.
혼수로 큰 봇장내서 사야 할, 혼수품목 위시리스트 No.1 샤넬.
‘출산 기념으로, 남편에게 샤넬 선물 받았어요.’
남편 사랑의 징표이자, SNS 자랑 품목 No.1 샤넬
미스터 선샤인에서 영어공부를 시작한 애신 아씨가 알파벳에 따라 단어를 읊조리던데... 뭇 여성들에게 C는 그저, Channel이 아닐는지.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대다수에게 그럴 테다) 아닌 게 아니라, 샤넬 오픈런 후기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7시 30분에 도착해서 받은 번호가 대기번호 53번.)
하루 한 나절을 길바닥에서 보내고 53번을 받아 샤넬 매장에 들어가 봤다는 글 작성자는 주옥같은 ‘오늘의 교훈’을 남겼다.
1. 샤넬 오픈런을 이왕 할 거면 전날 밤에 돗자리랑 이불 등을 챙겨서 잠을 자야 한다.
2. 그렇게 해서 들어가도 물건이 없을 확률이 크다.
3. 그냥 돈이나 모으자.
샤넬 매장에 들어가려면 반나절만큼의 줄을 서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는 결국 매장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귀하디 귀한 육퇴 살롱을 즐겨야 할 시간에, 전날 밤 텐트를 챙길 엄두도 안 났거니와... 매년 가격이 오른다는 그 가방을, 책 한 권 마음 놓고 넣지 못한 채 모셔놓을 때가 많을 그 샤넬을,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 주고 살 배짱이 없었다. 무엇보다 '칼럼비'론 체인 두른 샤넬백 하나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 무슨 호강을 누리자고 가방 하나에, 반나절 줄을 서서 구매할 일인가? 싶었다. 내가 샤넬을 메고 다니는 건가, 샤넬이 나를 얽매는 건가, 시시때때로 궁금해하면서.
그렇다 하더라도, 샤넬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집에서 나왔다가, 집으로 그대로 들어가는 등원 길에서도 간혹 신상 샤넬 가방을 메고 나오시는 등원 길 런웨이 위, 엄마들을 힐끗거렸다. SNS에 올라온 굳이 음식이 나온 테이블 위에 메인 음식처럼 올려진 샤넬 백을 확대해서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어찌 됐건 샤넬보다 에코백. 마음 놓고 담고 뺄 수 있는 그런 마음 편한 에코백이 최고지. 혼자 중얼거리며 지난년도 새해 다짐 속 샤넬엔, 가위표를 박박 그었다. 특히 카페에 갔다가도 의자 한 켠 가방을 걸어둔 채 잊어버리고 나오는 때가 빈번하던 건망증의 나라면 샤넬은 마음의 짐만 될 뿐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렇다고 이번 년도 새해 위시리스트엔 샤넬이 없으려나? 아마도 매년 샤넬은 올라갈 예정이다. '나를 위한 상징적인 소비'라는 명목으로. 샤넬이 육아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사랑하는 징표 즈음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번 사는 인생, 더 나이 들기 전에, '내 인생의 첫 샤넬' 하나쯤 들여야 하지 않을까? 뒤늦게라도 줄 서봐? 이와중에도 마음 한 켠 웅크려있던 샤넬 욕망이 속삭인다. 샤넬이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