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너무 섹시한 상사가 생겼다. 대한민국 사람이었지만 실은 미국 국적이었던, 어수룩한 한국말보다 유창한 영어가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검은 머리의 미국인'인 셈이었는데, 맙소사. 얼굴까지 잘생겼다! 스위스 학교 출신, 젠틀한 미소가 면면히 벤 남자가 내 상사라니. 오 마이 갓. 한 사람으로 인해 출근길이 이렇게 설렐 수 있구나. 오피스에서 벌어지는 두근두근 로맨스를 상상하며 남모를 웃음을 피식거리는 아침이 늘었다. 영어로만 진행되는 브리핑에서 그는 더 빛이 났다. 네이티브 영어 실력, 세계 곳곳 다져진 글로벌한 경력을 바탕으로 흘러나오던 브리핑은 내 귓가엔 달콤한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지쳐갔다. 한 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완벽주의에 숨이 막혔고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납득할 수 없는 그의 고집에 화가 났다. 그의 젠틀함 너머 숨겨져 있던 시니컬함에 가끔 섬뜩거리기까지 했다. 가까운 사람만 감지할 수 있을 그 사람의 반전 면모에 답답함이 몰려왔다. 납득이 안 가는 부분에 강박증도 있었다. 그 가운데 '웃으면서 돌려 까기', '뱅뱅 돌려 깐족거리다 후려치기'가 그의 특기였달까. 속 모르는 주변인들은 나의 섹시한 상사를 온통 부러워하기만 했다. 하지만 막상 그의 옆에서, 그의 밑에서 일해온 사람들이라면 곧 그만의 지랄 포인트를 모두가 알아차렸다. 알고 보니 그가 지나간 전 직장들마다 악명 높은 족적을 남겨온 블랙리스트 위의 상사였다. 그의 최측근이자 바로 아랫사람으로, 늘 완벽주의와 친절한 빈정댐 사이를 오갔어야 했던 나는 한참을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에 회의를 거듭해서 결론을 지었던 프로젝트가 끝이 보일 때 즈음 그는 특유의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지시사항만 적어놓은 메모 아래 두 문장만 남겨놓았다. "No excuses. End of discussion." 아주 오래전, 활자로 내게 전해진 이 두 문장은 꽤 오랫동안 내 마음 어느 구석 마음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내게 너무 일방적이고, 억울했던 말들. 수많은 브리핑을 거쳐, 팀원들과 협심해서 열심히 했을 뿐인데,변명하지 마라니. 팀원들에겐 어떤 말을 전해야 하지? 억울한 마음에 눈물까지 흘렀다.
#핫템퍼이거나
몇 해가 흘러, 내게 너무 핫템퍼인 상사가 생겼다. 오스트리아 국적이었지만 내가 생각해왔던 여유로운 성품의 유러피안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었다. 배타적이었고, 시니컬했다. 그의 밑에서 일했던 사람 여럿이, 제 풀에 지쳐 그만뒀다고 한다.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좋은 조건의 근무환경이었는데 하필 상사가 핫템퍼라니. 오로지 음악과 미술만 사랑할 것 같았던 낭만적인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그중 1%에나 속할 시니컬한 중년의 남자가 나의 상사인 걸까. 악명 높던 그의 성질머리에 미리부터 주눅이 들어 출근길에 발걸음부터 무거웠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나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주었다. 굴지의 대기업 외국인 고문과 영어 통역. 대기업 정규직 사원들 사이에서 우린 몇 안 되는 계약직, 유일무이한 이방인이었다. 동질감이 흘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친절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우린섞일 수 없었던 기름 동동 신세였던 까닭이다. 우리가 이방인임이 특히나 도드라졌던 때는 소방훈련이 있을 때였다. 비상 사이렌이 울리면 전 직원들이 사무실 밖으로 대피하던 때였는데... 우리에겐 대피가 없었다. 100평 남짓 넓은 사무실에 덩그러니 둘만 남은 우리는, Who cares!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오후의 캡슐커피를 마셨다.
'호통러 핫템퍼 고문이 달라졌어요' 고문에게서 전과는 다른 온화함을 모두가 느끼긴 한 모양인지 '호통러 고문이 달라졌어요.'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여전히 회의에서 호통을 치거나 시니컬했고 운전은 늘 거칠었지만. 가끔 Fucking S******이라며, 회사를, 몇몇 사람들을 흉보기도 했지만!
눈썹마저 하얗던 60대의 외국인 고문은, 계약직임을 서글퍼했던 20대 영어 통역인 나에게 종종 회사 밖 맛있는 밥을 사줬다. '업무상의 외출'을 핑계 삼아 내 대학원 지원서를 내는 길에 동행해주기도 했다. 물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난폭운전으로 말이다. 연인과 헤어져 슬픈 어느 날엔, "There are a lot of fish! Look overthere!" 내게 쿨한 기운을 불어넣어 줬다. 혹시라도 계약기간이 연장되지 않을까 기대하던 나에게 위로와 응원의 말들을 숱하게 남겼다. 원래부터 다정다감한 사람은 아니었던 터라 그 문장들마저도 담백하다 못해 무미건조했지만, 그 누구보다 따뜻했다. 나의 고문. 나의 키다리 아저씨. Mr. Johahn.
#둘다이거나
내 뱃속에서 품어, 내가 낳았다고 할지라도 아이들 위에 군림하는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는 시시때때로 아이 앞에서 욱하는 엄마가 되었다.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엄마. 의견은 묻지 않고 discussion 없이 통보하는 엄마. 수없이 No를 말하는 부정적인 엄마. 가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버럭 화를 내는 핫템퍼의 엄마. 나는 내가 손에 꼽았던 두 상사들의 부정적 단면을 모두 내보이던 그런 엄마였다. 그리고 현재도 종종 그런 엄마 시전 중이다. 나의 버럭에, 나마저도 놀랄 지경이 되면 뒤늦게 변명을 쏟아냈다. 아이의 계속되는 요구를 견디지 못해서. 보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욕구도 중요해서. 위험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가끔 내비치는 욱이라고 변명하기엔 내 인성의 바닥이 드러날 때가 너무나도 빈번하다. 내 일생일대의 분노와 화가, 내아이들에게 내보여진다니.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연약한 존재인 그들에게 말이다. 통탄할 일이었다. 하지만 분노의 금을 너무도 쉽게 넘어버렸다.
아이들의 상황이나 항변을 듣기도 전에, "조용히 해. 그만해." 말하는 건, 지난날 내 상사가 내게 말했던 "No excuses."에 "Shut up."이 더해진 정도쯤 될까? 정작 본인도 1화의 에밀리가 끝나는 그 순간을 너무도 아쉬워하면서 "No more TV!" 아이들이 보고 있던 TV 영상을 똑 꺼버리는 건 "End of discussion." 그 아팠던 문장만큼이나일방적인 처사가 아닐까? 그것도 엄마표 영어라며, 불시에 영어문장을 남발하는 배려 없는 엄마란.
화가 일었던 어느 밤의 끝엔 늘 반성이란 걸 한다. 부모의 미숙한 감정 조절 능력과 공격적으로 욱 하는 감정은 다른 감정들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한다. 실로 욱하는 부모 아래의 아이들은 감정적인 갈등이나 의견 대립의 상황에서 대화를 통해 타협하기보다 사소한 일이어도 크게 다투는 과정을 고스란히 배우게 된다는 거다. 타인에 대한 배려심없이, 공감능력 없이, 그저 부모의 문제 해결 방식을 답습해나가는 아이들.
아이 앞에 상사도 아니건만, 악명 높은 상사 그 이상으로 내 밑바닥을 보이는 때가 있었던 날엔
육퇴 살롱 안에서도 즐겁지가 않다. 쓰디쓴 데낄라 한 잔 털어 넣고 화를 내던 그 순간 전으로 되돌리고 싶어 하는 후회 속의 엄마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