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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Jun 21. 2022

전복全鰒을 대하는 다른 자세

육아 시작 후, 남편과 아들의 다른 위상

불과 일주일 전에 만났던 나의 20년 지기는,

달라진 내 모습에 놀라워했다. 풋풋했던 대학생 시절의 나와, 쌍둥이 엄마가 된 지금의 나 사이의 갭이란 실로 어마어마했을 테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씁쓸함에, 자세히 묻진 않았다.


(뭐가 그렇게 놀라운데?)


그녀는 '음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의 바뀐 음식 취향에, 내가 제법 요리를 즐겨한다는 것에, 특히 해산물도 스스럼없이 손질해낸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맞다. 나는 삼겹살 대신, 참치캔 속 참치 조각에, 쌈장만 얹어 상추쌈을 살포시 먹던 20대였다.

야심 차게 팔 걷어붙이고 간 농활, 날벌레로 시작해서 거머리로 끝나던 그 1박 2일 동안 빽빽 악만 지르고 돌아온 여자였다.


지금은 돼지기름에 튀겨진 듯, 노릇해진 삼겹살을

2점 넣고 편 마늘에, 양파 장아찌에, 구운 묵은지까지 얹어 상추 잎에, 열무잎까지 싸서 입 터질 듯 먹는 40대 쌍둥이 엄마다. (막상 내 지갑에서 사려고 하면, 야채값도 비싸다...) 살아있는 랍스터를 마주하고, 생선 내장을 떼어내 제법 그럴싸한 요리를 낸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복과 일주일을 꽉 채워서

보낼 만큼 전복을 좋아하진 않는다. 식습관이 많이 달라졌다 하더라도, 찾아가 먹을 만큼 해산물 러버는 아닌 데다, 엄마니까 하는 해산물 요리인 셈이다.







하지만 요 근래, 전복 일기라 써도 좋을 만큼, 전복으로 꽉 찬 일주일을 보낸 적이 있었다.


전복을 열렬히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전복이라는 식재료를 선호하게 된 것은_물론 가족 때문이다. 아무리 대규모 양식이 가능한 때라고 해도 여전히 다시마, 미역 등을 먹고 자라는 전복은 보양 수산물의 대명사 아닌가.


살아 움직이는 전복의 생동감에 열광하면서

전복내을 애정 하기도 하는, 남편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들 먹일 욕심이, 나로 하여금 전복의 생명력에 애타하게 만들었다. 육아가 시작된 이후부터 난 아내보다 엄마다.







늦은 귀가와 함께 맞이하게 된 전복. 아직 싱싱하게 살아있을 때라, 그저 반가웠는데 애가 타는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상자를 열자마자 꿈틀거리던 전복 한 줄을, 바로 시댁 부모님께 가져다 드렸다. 전복 또 한 줄은, 친정 부모님께 보냈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불로장생을 위해 먹었다고 전해질만큼 귀한 대접을 받아온 전복, 살아있을 때 얼른 가져다 드릴 마음에, 마음이 바빴다.


그래도 육퇴 후 바로 전복 손질을 감내하며 그 쫄깃함을 즐길 만큼의 애정은 아닌지라 내심 '시댁행'하였던 남편이, 전복을 먹고 왔으면 했던 바람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생전복 5마리를 9시가 넘은 시각에 내장까지 가뿐히 드시고 오셨다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 발 각질도 어찌하지 않고 대충 사는 내게, 전복 손질이란_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전복 살 사이사이를, 박박 솔질해서 닦아내고 흠집 없이 전복 내장을 떼어내는 일. 매끄럽게 전복 껍데기와 살을 분리해내는 것. 그보다, 생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겪을 전복의 고통 따위 애써 모른 척하는 일은

너무도 곤욕스럽다. 격하게 꿈틀거리는 생낙지를 뜨거운 육수 안에 넣는 일만큼은 아닐 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생명력에, 어느 누군가는 희열을 느끼며 설레 할지도 모르는 일지만.


딱히 그런 감흥을 즐겨하지 않는 사람이라...

'나 지금 살아있소' 티 내는 해산물 손질의 시간은, 번거로우면서도 피곤하다. 불편한 감정이 이어지는 가운데 절정에 달하는 순간은, 전복 이빨을 떼어내는 때다. 오도독. 이 연체동물에 있어 유일하게 단단한 부분일 이빨을 칼로 끊어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괴로움의 한숨이 내뱉어진다.







그래도 어찌어찌 손질을 하여, 아이들을 위한 전복 버터구이를 할 땐 마음이 좀 누그러다. 버터는, 어느 재료를 만나도 매료시키는 매력 있는 녀석.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며.


먹기 좋게 썰어 노릇노릇 버터를 입힌, 전복구이를 아이들 앞에 가져간다. 남편 앞에 귀차니즘이 발동하던 전복은 아이들 앞에서 적극적으로 어필된다. 설득도 했다가, 회유도 했다가, 거래도 했다가, 협박도 했다가... 겨우겨우 한 접시를 먹이고 나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과연, 전복이로고.)







아이들에게 내가 목표한 만큼의 전복을 먹이고 나서 뿌듯해하다... 설거지와 집안일, 목욕, 잠자기 전 독서 등을 마치고 아이들을 재우는 과정에서 나 또한 잠이 들었다.


"뿌듯한 마무리였어..."


그 만족감의 중심엔 여전히 전복이 있었다. 그때까진 그랬다.


그런데 남편의 늦은 귀가와 함께, 나도 모르게 선잠에서 깬 이후로 전복에 반전이 있었다. 생전복의 활력을 아까워하던 남자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육퇴 후의 시간에 다시금 전복을 마주하게 했다.


아침식사 전복죽,

점심은 전복 껍데기 넣고 끓인 나 혼자 먹는 라면

저녁 식사 전복 버터구이,

야식으로 생전복회.

어쨌거나 다시 전복 손질.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전복으로 1일 4식한 하루.







아이들을 위한 버터 전복구이를 할 때와는 다르게 어쩐지 칼 끝이 거칠었다. 오도독 끊어지는 전복 이빨이, 다른 때보다 더 징그러 보였으며 나의 손질에 몸부림치던 전복의 미세한 움직임이 안쓰러움 대신 분노로 변했다.


(아이들을 재우다 잠에 들었으면 쭉 잘 일이지... 왜 잠들지를 못하니!)


화장을 지우는 것도 귀찮아 대충대충 씻었건만,

로션도 바르는 둥 마는 둥 하였건만,

자다 깨서 나는 왜, 다시 전복을 살뜰히 솔질하고 있는 것인가.








그날 밤 11시, 남편은 전복의 쫄깃한 식감에 흡족해하였고 전복 내장까지 야무지게 츄릅한 채

배시시 웃으며 잠에 들었다. 어설픈 선잠으로 수면 패턴이 깨진 나는, 다시금 불면증의 밤을 보내었다.


오도독 소리가 생생하던 잠 못 이루는 밤.


다음 날 아침 메뉴는 전복 리소토였다. 식탁의자에 앉으면서 전복 때문인지 피부가 매끈하다 중얼거리던 남편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얘들아, 전복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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