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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Jun 26. 2022

단어 건망증

이상할 일이다. 유독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나에게만 잦다. '물건, 어디까지 잃어버려봤니?' 대회라도 있으면 나가서 우승이라도 할 판. 건망증에 대한 주제로, 경험담을 이야기하자면 밤이라도 새울 판이었다. 건망증이란,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기억하는 속도가 느려지거나 일시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장애의 한 증상. 건망증의 원인으로, 트레스나 알코올, 노화 등을 말할 있겠지만 경험이 전혀 없던 고등학생 때에도... 노화 진행 전이었던 20대 초반에도... 그저 내게 빈번한 일이었다. 잊거나, 잃어버리는 일.







사소하게는_말할 단어를, 잊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빈번하게 물건을 잃어버렸고 길을 잃었다. 유일하게 머릿속에 선명히 남겨두는 건, 잊어야 기억뿐이었다. 어리바리하지만 끝엔 명확한 사람이랄까.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어떤 책이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나."라는 질문에, 제목도, 시인도 기억나지 않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건, 그 시의 마지막 행 한 줄이었다 한다. '문학적 건망증'의 과정 속에서 쥐스킨트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을 느꼈다고 했는데... 그러기에  나는? 문학적 건망증은 지적 이기라도 하지... 나의 단어 건망증은, 극히 사소한 범주라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수치심'까지 느낄 지경이었다.


결혼하기 전,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이 아파트 건설 현장 앞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분양받은 아파트 입주일이 얼마 남지 않은, 한창 마무리 단계에 있던 '그 명의의' 아파트였다. 그때의 나는 결혼적령기였던데다, 결혼에 대한 이슈에 온통 사로잡혀있었던 때였다. 행여 결혼 압박에 대한 마음이 새어 나와, 상대에게 부담감으로 닿을까 봐 애써 의연하던 때였다. 그런데, 입주일 임박의 아파트 구경이라니?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해도 두지 않을 수가 없던, 중대한 이벤트의 데이트 날이었다. 먼발치에 서서, 설레는 마음으로 아파트를 눈에 담고 옆에 서있는 이 남자와 함께 꾸릴 미래를 잠시 꿈꾸었다. 하지만 그 단꿈 역시 티 내지 않았다. 괜한 설레발을 들킬까 봐, 더욱 도도하게 걸었다.






아파트 인근의 산책길을 걸으면서, 이 남자와의 연애가 더욱 절실해짐을 느꼈다. 유난히 키가 큰 나무들 사이로, 산책길이 호젓하고 물 흐르는 소리마저 맑았던 날이었다. 할랑할랑 여성스러운 원피스가, 운치를 더했다. 그러던 중,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_날벌레 떼 사이를 거닐게 되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명확하게 기억하지도 못할 단어 대신, 나온 한마디라곤

"웬 느자구들이 이렇게 많담!"이었다. 이런! 내 입에선, 어쩌다 '느자구'라는 단어가 새어 나왔을까. 느구란, 싹수의 전라도 방언이. '싹수가 노랗다'의 다른 말로 '느자구없다'를 쓰는 것인데... 다시 표현해보자면, '장래성이 없다, 가망이 없다, 싹이 안 보인다' 이런 뜻이다. 이러나저러나 결혼을 염두한 남자와 걷는 그 길에서, 숙녀가 입 밖으로 내뱉을 단어나 표현은 아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아차 싶은 마음에 정정을 한답시고 또다시 나온 단어는 '깔따구'였다. "아, 아니... 깔따구가 엄청 많네요... 호호." 깔따구는, 강가를 지나갈 때 무리지은 모습을 볼 수 있는 모기와 유사한 곤충이다.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는, 밀도가 굉장한, 불빛에 특히 잘 몰려드는 날벌레. 깔따구 대신, '초여름의 하루살이'라든가, Lake flies라는 영어단어가 생각났으면 더 지적이었으련만. 어찌 됐건, 느자구와 깔따구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산책길이었다.







그 날밤, 형용할 수 없는 비탄과 수치심 사이에서 수 차례 이불 킥을 하다 잠에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망각 이외에 남는 것이 없는' 밤이어야 했지만 떼로 날아드는 깔따구라는 단어 무리에 끼어 잠 못 이룬 밤이었다. 근 며칠 동안 느자구와 깔따구를 수차례 쓰고, 끼적이기를 반복했다. 연필심이 부러졌고 애먼 종이에 구멍이 났다. 그날의 데이트 때 '초여름의 하루살이' 적절한 단어는 생각 안 났을지언정, 그때 그 남자와 결혼한 지금까지도 잊어야 할 그 기억 선명하다.  덕에 '느자구'라는 단어 한 번을 안 쓰다가, 이제야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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