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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Jul 14. 2022

여권없이 무단횡단한 날

여권을 잊은, 두바이 관광객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꼬박 13시간을 날아, 아랍에미레이트 연합국(United Arab Emirates, UAE)에 도착했다. UAE는, 수도인 아부다비, 두바이, 아즈만, 푸자이라, 샤르자, 라스 알 카이마 등 7개의 토후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가 아부다비이지만, 사람들 귀에 익숙한 건 두바이. 나는 두바이에서 본격적인 취업모드에 들어서기 전, 2주동안 아즈만(Ajman)이라는 곳에서 친구 집 신세를 지기로 했다. 7개의 토후국 간, 딱히 국경이 있지 않아, 비교적 드나들 수 있다고 한다. 새로운 대륙으로의 입성이 주는 설렘에, 시차 적응도 잊었다. 하지만 두바이가 블링블링한 뉴욕 다운타운의 화려함이 있는 도시라면 아즈만은 우리나라 고즈넉한 시골 소도시 분위기랄까. 두 지역이 주는 온도 차이는 극명했다. 읍내 격인, 아즈만에서 친구 집 아파트와 동네 마트만 오가는 며칠을 보내고 나니 곧 시들어갔다. 사막의 후텁지근한 모래바람 탓도 있었지만, 기대감과는 사뭇 달랐던 까닭이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두바이에 약속이 생겼다. 게다가, 만남의 장소는 다름아닌 두바이에서 유일무이하게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치킨집!  달력에 빨간펜으로 여러 번 동그라미를 치고 벼르고 벼르다, 길을 나섰다. 






 마침 볼일이 있어 나간다는 아즈만 주민,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두바이까지 가서 버스를 갈아탔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도 10-15분 남짓 걸어야 했다. 익숙하지 않은 두바이 거리에 서서, 한 번도 가보지도 않은 전설의 핫플 '김 치킨 KIM Chicken'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마음만은 바빴다. 횡단보도까지 걷는 시간도 아까워 주변을 살핀 후, 무단횡단으로 길을 건넜다. 총총 발걸음을 경쾌하게 옮겨 3차선 도로의 2/3쯤 건널 무렵이었다. 뒤에서 말을 걸어오던 낯선 남자가 있었다. 물론 아랍어였던지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내 귀엔 "저기요. 혹시 시간 있으세요?"로 들렸다. 강남역 지오다* 건물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내게, "저기요. 혹시 전화번호 좀..." 묻는 이가 있었던 흔치 않은, 어느 날처럼. '한국 여자는 어딜 가도, 인기로구나. 두바이 대도시에 오니 드디어!' 근거없는 생각이 깃들었다.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애매하던 길이의 머리마저 찰랑거리며 돌아섰다. 도도한 표정은 절로 나왔다. 하지만 내가 생콩한 표정을 짓든 말든, 남자는 관심이 없었다.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기 바빴다. 애초에 그 남자의 말을 들을 생각도, 의지도 없었던 나는 손사래를 치며 "됐어요~ 저 바쁘거든요!" 톡 쏘아붙이며 다시금 머리를 찰랑거리며 돌아섰다. 횡단보도를 다 건널 때 즈음, 남자의 문장 중 단어 하나가 꽂히었다. '경찰'


경찰이라는 단어에 무의식적으로 동공은 커졌지만, 이내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래~ 아테네에서도 경찰이라면서 여권 보여달라는 애들 여럿 봤거든!' 여전히 사태 파악은 안 되었고 영문 모를 도도함만 고수하던 한국인 관광객이었다. 횡단보도의 끝에 다 닿아, 코너를 돌 때까진 그랬다. 막다른 골목의 끝에 서있던, 제복을 입은 두바이 경찰 셋과 그들을 둘러싼 필리핀 국적의 여성 세 명을 확인하기 전까진! 그리고 한 켠에 서있던 경찰차. 그제야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왔다. 나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은, 두바이의 사복 경찰. 그는 희놀롤 해진 내 얼굴을 확인함과 동시에 다른 제복에게 눈짓을 보내곤 그는 다시 유유히 횡단보도 너머로 사라졌다. 입가엔 비웃음이 서려있었다.


경찰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이리 와! 여권 줘봐!"







세 명의 경찰들은 필리핀 여자들 셋의 비자를 각기 확인하며 개인 신상을 받아 적었다. 그런 그들에게, 필리핀 여자 셋은 지극히 고분고분, 협조적이었다. 여권을 준비해야 하는 타이밍의 나는? 양념통닭, 맥주 한 잔에 대한 기대감만 잔뜩 넣어왔지, 여권 따위 챙길 준비성은 없었다. 가방 속에, 여권을 비롯해서 신분증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저 지금, 여권 없는데요..."


자신 없이 내뱉었던 내 한 마디에,

"뭐라고? 여권도 없어? 너 무슨 비자야. 무단 횡단하면 600 디람(Dhs)벌금인 거 알아 몰라. 여권도 없으면...."


경찰 1은 완강한 어투로 화를 냈고 나머지 경찰 2는, 그러거나 말거나... 날 필리핀 여자들 중 하나로 보는 듯

무심한 시선을 날렸다. 그러다 경찰 3은 이내, 필리핀 여성 3의 뒤처리에 신경을 쏟았다. 쭈뼛쭈뼛 서있는 동안, 늘 계산 머리 없던 내 머릿속엔 여러 숫자들이 바삐 오갔다.


(벌금 600 디람이면 곱하기 300원이니.... 거의 18만 원!)


갓 UAE에 도착해 아직 본격적으로 노동이라고 할 만한 일을 시작하지도 않은 외국인 노동자의 지갑 사정에 18만 원은 굉장히 큰돈이었다. 무단횡단 한 번에, 18만 원이라고?! 횡단보도까지 걷는 3분의 시간과, 50m 남짓의 거리가 아까워 무심코 건넜던 길, 18,000원짜리 치킨을 보다 빨리 맛보기 위한 지름길의 대가가 180,000원이라니. 


순순히 18만 원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 치킨을 지근거리에 두고 18만 원 발목이 단단히 잡혔다. 수긍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고분고분은 커녕, 억울함만 밀려들었다. 수어분 머리를 굴린 끝에 묘안이랍시고 짜냈던 건, 경찰의 영어를 못 알아듣는 외국인 관광객 행세였다. 잠복근무를 하던 경찰에게 도도한 속사포로 쏘아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영어 못 알아듣는 연기라니. 그런데도 혼신을 다해 연기했지만 그들이 묻는 말에 내 목과 눈동자는, 나도 모르게 Yes or no로 답하고 있었다. 이내 들통이 났다. 다시 전략을 바꿔, 슈렉 고양이의 눈동자로 순진무구한 표정도 지어봤다. 그 역시 통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이실직고 통사정이다.







"있잖아... 나 한국에서 여행 왔는데. 여권을 그만 두고 왔어. 너희 한국 알지? 부르즈 칼리파. 삼성. 한국."

한창 두바이에서 한국 기업과 싸이의 이미지가 좋았던 때라 한국인임을 강조하는 전략을 짰다. 실패. 그러다 두바이엔 해외취업차 나왔으며, 친구 집 신세 중... 딱한 신세를 어필하는 문장들로 옮아갔다. 실패. 강남스타일 싸이 말춤에, 슈퍼주니어 쏘리쏘리 손바닥 춤까지 출 기세에 접어들었다. 춤을 추기도 전에, 실패. 점입가경이었다. 본격적으로 쏘리쏘리 춤이라도 춰야 하나, 하고 있던 찰나_"여권. 비자. 벌금" 단호하게 세 단어만을 내뱉는 경찰관 1의 싸늘함과 마주했다. 그 어떤 전략도 통하지 않을 기세. 다른 필리피노들처럼 순순히 응하지 않고 혼자서 1인 3역 혼신의 연기를 펼쳐내던 나에게 지치기라도 한 듯 경찰 2는 경찰차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나는 별거 없는 가방을 연신 뒤지기도 했다가, 그 가방 안에 여권이 없다는 시늉도 해보았다가, 다시 과한 몸동작으로 가방을 뒤적이기를 반복했다. 오버스러운 제스처와 오글거리는 멘트의 연속이었다. 경찰관 셋은 필리피노 셋에게 다시금 집중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아도, 혼자 최선의 연기를 펼치던 나는 급기야 도망을 결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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