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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보다 딸. 철없는 엄마의 육아 이야기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 하였다. 제 스스로 때가 무르익어, 내게로 오는 것이라 한다. 


결혼 후, 당연스레 임신과 출산의 관문을 넘는 건 줄 알았지만 대신 난소 기능 수치 0.8이라는 숫자를 덥석 받아 들게 되었다. 그리고 난임 병원에서 처방해준 숱한 약들과 주사액, 빼곡히 '임신 실패'를 상기시켜주던 카드 사용내역서 사이를 오갔다.


'시절 인연'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위안 삼았다. 주변에서 건네는 오지랖 어린 관심을 피해 다녔다. 끊임없이

나 스스로의 자괴감과 마주했다.


화가 났다. 대학 입시, 취업, 연애, 결혼.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하나씩 열 때마다 호락호락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건만! 임신, 너마저.


난임치료를 위해 부산, 대구, 서울 찍고 광주. 여러 도시를 떠돌았고 전국의 절들에, 초를 켜고 쌀을 올렸다. 그러다 지치고 지쳐, 임신이라는 단어를 놓고 이혼이라는 카드를 솔곳이 꺼내어 들려던 부부싸움 끝에 임신, 피검사 수치를 받아 들었다.


가까스로 쌍둥이 임신이라는 소식을 접했지만 행여 설렘이 실망이 되고, 기대가 슬픔이 될까 봐 두려워 기쁜 기색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만나기 만을 기다려, 39주에 접어들었다. 17년 11월 이맘때쯤, 나는 쌍둥이가 신호를 주기만을 기다리며 신혼집이 있던 동네에서

친정집까지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걷고 또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든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유난히 더 경쾌하게 들리던 낙엽 사그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자연분만의 날"을 기대했다. 유도분만 실패, 무통주사 실패 끝에 생지옥을 경험하다, 쌍둥이를 품에 안고 그와 동시에 산고의 고통만큼 '젖몸살'도 무섭더라는, 출산 선배들의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내 인생 첫 육아였건만, 앞으로 울고 뒤로 우는 두 아이를 한꺼번에 케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시댁과 친정으로부터의 육아 지원 찬스 역시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그토록 바라고 꿈꾸던 엄마가 되었건만,

이제는 한 아이 젖을 물리다, 다른 아이 젖병을 드는 새벽녘에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들을 잡으러 다니며 씩씩대고 있었다.


난임 일상에서 탈출만 할 수 있다면, 엄마라는 빛나는 훈장을 달 수만 있다면. 나와 남편을 닮은 아이를

낳을 수만 있다면. 바라던 가정법의 상황이 현실이 되었건만 나는 또 다른 한숨과 눈물 속을 오갔다.

그리고 빈번히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왜, 출산의 고통 끝에 육아의 수고로움까지 여자가 혼자 감내해야 하는 거지? 아이들 사이에서 퀭한 눈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나는 이렇게 희미해져 가는 걸까? 그런데도, 왜 명절에나, 제사

온전히 바빠야 하는 건, 여자인 걸까?


그러다 어떤 날은, 화가 치밀어올라 아이들에게 쏟아내기도 했다가 수시로 그 불똥을 주변에

튀겼다.


힘듦을 토로하는 내게, 친정엄마는 말했다.


(라테는 말이야...)


나는 넋두리 정도로 가볍게 시작했을 뿐인데 엄마 때의 육아 이야기는 참으로 다채롭게 펼쳐졌다. 손을 불어가며 기저귀를 빨던 냇가를 지나,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사상 준비를 위해 걷던 시장통에 접어들었고, 아이를 둘러업고 회갑연 잔치를 열던 마을 경로당 앞을 찍었다. 급기야, 총성 소리가 쏟아지던 5월의 어느 날, 이불만 뒤 짚어 씌워주고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이불속에까지 드나들다 왔다. 지금의 나보다 더 앳된 나이의 엄마였다 한다.


그 이야기를 하며 엄마는 내 건조기를 훑었고 제사상 대행 명함을 힐끗거렸으며 지난날의 한정식집 음식을 논했다. 그리고 '아이 돌봄'을 통해 간간히 오시던 돌 봄샘의 안부를 물었.


쌍둥이가 꼬물이를 벗어나 6세가 된 지금까지 내내

나는 엄마와 여자 사이를 오가고 있다.


빈번히 뱃살을 매만지며 44-55 사이즈를 오가던

옛날을 그리워하고 10km의 조깅마저 허락지 않는

몸을 서퍼한다. 경력단절을 걱정하며 다시 들 일이 있을까 싶은, 노트북 가방 대신 아이들 학원 가방을 들쳐 멘다.


그러면서 이제는 홀가분해져야 마땅한, 친정엄마의

육아 도움 손을 은근히 기대해본다.

나이가 든 지금에서야, 옛날에의 시집살이 설움이 불쑥불쑥 생각나 화가 난다는 친정엄마에게. 세 아이, 교육에서부터 취업, 연애, 결혼까지_ 하나하나 관문을 넘을 때마다 때론 같이 뛰고 늘 눈치를 살피던 엄마에게.

 

철없는 딸은 이러할 진데

'자식은 늘 아홉을 뺐고도 하나를 더 달라고 조르는데

부모는 열을 주고도 하나가 더 없는 게 가슴 아프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대사처럼 엄마는 여전히 자식 앞에서, 그리고 그 자식의 자식 앞에서 또다시 기꺼이 '을'이 된다.


염치가 없을 법도 한데, 육아 도움마저 기대하는 딸들 앞에, 미안해한다. 몸이 하나뿐인 엄마는 다섯 손주를 한꺼번에 다 안을 길이 없어 난처해한다.


아이들은 저마다 모든 날, 모든 순간 하루하루가

색다른 웃음과 감동을 준다.  '열을 주고도 하나가 더 없는 게 가슴이 아프다는' 부모 마음을 어설프게나마 헤아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그 허무맹랑한 표현이 이해가 될 만큼. 시시때때로 웃었다가, 눈물을 훔쳤다가, 분노했다가... 육아 일상 속의 감정들은 널을 뛴다. 그럼에도 어느덧 철없는 엄마가 철이 드는 '진짜 부모'가 되는 순간들이 첩첩히 쌓이겠지...'그렇게 부모가 되겠지' 위안삼으며 육퇴 후 마시는 맥주 한 잔으로 철없는 엄마를 달래어본다. 그리고 생애 첫 육아로 여전히 부산스러운 엄마에게

응원의 인사를 중얼거려본다. 내 부모가 그동안 쏟았던 피, 땀, 눈물을 되뇌어본다. 오징어를 질겅거리며,

노래를 한 곡 틀어본다.


어른이 되어서

현실에 던져진

나는 철이 없는

아들이 되어서

이곳저곳에서

깨지고 또 일어서다

외로운 어느 날 꺼내 본 사진 속

아빠를 닮아있네


가족사진 속에

미소 띤 젊은 우리 아빠 엄마

화려한 시절은

나에게 다시 돌아와서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그을린 그 시간들을

내가 깨끗이 모아서


당신의 / 아들의

웃음꽃 / 피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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