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있다. 보기만 해도 귀엽고, 순수한 친구다. 볼은 통통하고, 애교도 많고, 웃는 것도 예쁘다.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은 정말 즐겁다. 뭐든 해주고 싶다. 대부분은 그렇다.
친구는 내게 모든 것을 의지한다. 밥도 내가 챙겨주어야 하고, 씻는 것, 물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종일 놀자고 한다. 대부분은 뭔가를 흔들거나, 동물 소리를 내는 희귀한 놀이를 좋아한다. 친구는 웃음과 행복도 내게 의지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나 순수하게 나에게 모든 것을 위임한다. 유일한 보상은 친구의 웃음이다. 해맑고 예쁜 웃음 하나로 내 모든 피로를 스스로 씻어야만 한다. 친구는 절대 집에 가지 않는다. 나와 x축, y축, z축을 함께 하며 모든 것을 함께 한다. 친구가 너무 좋지만, 나는 잠깐은 혼자 있고 싶다. 친구가 너무 귀엽지만, 친구와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친구에게 잠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다. 친구가 잠을 자는 것. 죽을 힘을 다해 친구를 재우고 싶지만, 친구는 내 품에서만 잠을 잔다.
친구가 내게 성질을 부린다. 내 머리도 잡아 당기고, 수시로 멱살을 쥔다. 하루종일 운다. 나는 친구를 달래야 한다. 친구가 울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친구와 함께 하느라 손목과 허리가 나간다. 정신도 나간다. 친구가 너무 좋지만, 나는 친구와 함께 있는 것이 힘들다.
친구야 잠깐만. 지금 네가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내게 모든 걸 위임하고 네 말대로만 하길 바라는 거니?
친구를 사랑하지만, 나는 친구의 시계로 하루를 살아야 한다.
친구가 일어나라고 울음소리 알람을 켜면 일어나고,
자고 있으면 자근자근 밟히고,
쉴 새 없이 목덜미와 멱살을 잡히고,
식당 이모님처럼 쉴새 없이 우유와 이유식과 반찬과 간식을 대령한다.
조금 지나면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쏭을 들어야 한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장난감 귀퉁이가 부서져도 내 탓,
개미가 보이다 안 보여도 내 탓,
손에 잡고 있던 비비탄 총알이 땅으로 굴러가 안 보여도 내 탓,
옷이 내려가서 잡고 내려줘도 내 탓,
쉬가 잘 안 나와도 내 탓.
지구 평화는 모두 나 때문에 깨지는 건가,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나는 절대자인가 파괴자인가. 정신 바짝 차려야지.
육아는 그렇다. 육아가 힘든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나의 자율성보다 아이의 시계로 살며, 감정의 종착자로 끊임없이 보듬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적 불행이 없어도, 아이가 보기만 해도 예뻐도 그렇다. 아이가 태어나고 초반 3년은 잠을 못자고, 밥을 못 먹는다. 다음 몇 년간은 지구 멸망급의 불만과 징징을 온 몸으로 받아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늘 ‘기꺼이’ 그 길을 택한다.
그 시간의 찰나에,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싸울지라도 다시 ‘기꺼이’ 그 길로 돌아간다.
함께 있는 것이 결코 편하지는 않지만, 이제 더 이상 그 친구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이제 이 아이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우리의 이름은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