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를 한지 사년째. 나는 강박적으로 요가를 한다. 아침에 일어나 삼십분, 자기 전 한시간. 요가를 하면서 상념이 줄어들거나 우울이 사라지거나 멍든 영혼이 기적적으로 생기를 되찾는 일은 없었지만 적어도 들여다보는 일을 보다 정밀하고 세심하게, 차분하고 깊게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글을 쓴다는 일은 어딘가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일이다. 그것이 아름다움이든 기쁨이든 상관없이. 예전에는 불편함이 불안함으로 그다음에는 신경질이나 좌절, 끝없는 우울로 쉽게 번지곤 했다. 몸이 아팠고, 마음은 더 아팠다. 비틀린 문짝에서 지나온 시간의 녹이 어두운 계절의 빗물처럼 번져 지울 수 없는 얼룩으로 종이 위에 떨어졌다. 마무리가 없는 비명이었다.
요가를 한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한 후 진지하게 견디는 일이다. 멈춰있지만 움직이고 움직이는 것 같지만 멈춘다, 는 말은 요가에 잘 들어맞는다. 버티는 동작이 꽤 있지만 버티는 와중에도 근육은 부드럽게 늘어나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든 몸은 흘러가고 있다. 그 흐름을 잘 들여다보는 일, 그것이 요가다. 수련을 마치고 사바아사나를 하면서 수련전과 달라진 몸의 구석구석에 숨을 흘려넣고 눈길을 준다. 대체 내 몸에 이런 근육이 있었단 말이야, 라고 되묻고 싶을 만큼 몸은 첩첩산중, 골짜기와 계곡이다. 그안에 물이 흐르고 안개에 머리를 적신 나무들이 있고 새의 둥지도 있다. 아침과 저녁의 몸은 하룻동안 해가 움직이면서 양지와 응달이 생기듯 색과 결이 다르다. 한발로 서서 다른쪽 다리를 들어 엄지발가락을 잡고 코와 허벅지가 만나게 하는 동작 같은 것을 하면서 숨을 마시고 내쉴 때 나는 객관적이고 차분한 마음으로 다리와 복부, 상완의 근육을 바라본다. 들여다보는 일을 하면서 내 안의 커다란 어둠과 맞닥뜨렸을 때, 이제 나는 공포에 질리거나 스스로를 혐오하는 일을 조금은 다스릴 수 있다. 그것은 나다, 내 안의 무엇이다, 라고 들여다볼 수 있는 힘을 나는 요가를 통해 얻었다.
달리는 소설가 하루키 씨도 역시 그랬나 보다. 소설은 특히나 긴 시간 앉아서 집중해야 하는 작업인데, 그가 달리지 않았다면 몸이 상하는 것은 둘째치고 어느 순간 문장이 어느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글쓰는 사람치곤 파삭파삭 건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을테니 우리는 영혼의 습기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몸을 움직여서 열이 날 때, 조금은 단순해질 때, 곰팡이와 녹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먹으면서 젊음이 주는 찰나의 재능에 윤기가 사라졌을 때, 이미 수없이 근육통과 부상으로 좌절해본 육체는 '느리게 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할 수 있다. 요절의 축복을 놓친 작가에게 남은 희망이라고는 죽을 때까지 쉼없이 쓸 수 있는 '절망도 희망도 없는 작업의 지속' 뿐이다.
그의 달리기에 축복을-. 나는 오늘도 다리를 벌리고 골반을 낮추고 언젠가는 배꼽을 바닥에 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코를 바닥에 댄다. 우파비스타코나아사나, 박쥐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