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유고산문집 <오늘의 착각>

by 별이언니

마음의 정한 곳을 거니는 일, 시선이 닿는 곳을 골똘히 여기는 일, 새벽에 길어올린 시를 한밤에 다시 어루만지는 일.

어떤 이름을 생각하면 아름다운 언어 몇이 따라오는 것은 얼마나 축복같은 일인가. 허수경, 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그러하다. 내겐 늘 자욱한 저녁빛의 시인. 해가 사위는 찬란한 풍경 속에 조그맣게 서 있는 사람. 온통 금빛과 주황빛으로 눈이 부신 세계에서 홀로 조그마한 검은 점으로 떠올라 있는 이. 그것이 내게는 허수경의 시이고, 시인은 늘 시로 매겨지니 허수경이라는 사람의 이미지이기도 했다. 잘은 모르지만 왠지 그럴 것만 같은 사람. 제멋대로 생각해보는 나만의 은근한 폭력.

시인은 어수선한 세상을 떠나고 우리는 문자 그대로 병든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럴 때 가만히 다가와 딸기덩쿨과 젯상의 나물로 비빈 밥과 그릇에 쓸쓸하게 남은 육회와 실제로 보면 왠지 거칠 것만 같은 화어의 빛깔과 바다와 떠도는 사람들과 경계없이 뭉그러지는 도시들. 그 모든 해질녘 풍경에 오두카니 서 있는 그림자.

왜 시인의 시가 그렇게 사무치는지, 쓸쓸한지, 한 모금 마실 물이 남은 커다란 페트병을 들어올리는 손과 같은지, 분명 그녀도 적도 근방의 태양과 발굴지의 흙먼지와 색과 모양이 미묘하게 다를 꽃들이 핀 정원과 새벽과 한밤을 살았고 그 시간의 언어를 남겼음에도 왜 나는 그녀를 떠올리면 낮과 밤의 경계 - 세계가 잠깐 보물창고의 문을 열어 눈부신 비밀을 보여주는 은밀한 시간을 생각하는지 -

줄곧 생각했다. 산다는 일을 착각여관에 묵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여행자로 살아온 사람의 쓸쓸함에 대해. 쓸쓸함이 이력이 되어버린 어느 착각에 대해.

나는 사는 일이 가끔 꿈같아서 - 이미 죽어버린 나무뿌리가 끝나지 않는 눈보라 속에서 꾸는 꿈이 아닐까, 차가운 입술을 깨물어보는데. 착각은 꿈에 비하면 실체가 있다. 몸을 가진 상태다. 그러니 그녀의 여행과 떠도는 잠은 깊다. 따뜻하다.

궁금하다면 당신도 착각여관에 들어 숙박계를 적고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 방문을 열어보라. 당신에게는 어떤 시간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 희고 좁은 침대에 먼저 와 앉아있는 시는 어떤 표정으로 당신을 맞이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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