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에 주르륵 적힌 작가님 이름과 작품명만 봐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한글을 만화책으로 배운 나에겐 내 영혼의 팔할과 어쩌면 육체의 일할 정도를 이룬 삶의 일부이니. 다른 것에는 엄하셨지만 유독 만화보는 것은 그렇게 간섭하지 않으셨던 집안어른들 덕분에 매월 잡지가 나올 때가 되면 모아둔 용돈을 들고 발이 구름에 실린 듯 서점으로 달려가곤 했다. 무럭무럭 자라느라 삐그덕거리는 몸과 모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감정이 흘러넘쳐 엉망이 된 영혼을 달랠 수 있었던 유일한 구원.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절박할 필요도 없었지만, 언제라도 자기 앞에 닥친 고난이 우주 최고인 진리에 비추어보면 하루하루 살아남느라 애썼던 나에게 주던 상.
대학생 시절 기숙사 아래 대여점에 들러 쇼핑백이 찢어져라 만화책을 담아오곤 했다. 그렇게 감정을 만들고 그렇게 사람에 대해 배웠으며 그렇게 인생에 대한 태도를 정립했다.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을 모두 만화와 함께 했다.
지금도 만화광이다. 분기마다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챙겨보고 오래전부터 지켜봐왔던 장기연재만화들을 놓지 못한다. 만화를 보고 유치하다가 말하는 사람들에게 '읽어나 보고 말하라-' 고 나도 일갈하고 싶다. <호텔 아프리카>를 보면서, <아르미안의 네딸들>을 보면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바람의 나라>의 연을 보면서, 강경옥의 만화들, 내겐 가장 강한 여인이었던 <불의 검>의 소서노, 천계영의 <언플러그드 보이> <오디션> … 아아 빛나는 이름들을 다시 만나고 친구도 없이 외로웠던 내 손을 잡아주었던 친구들을 다시 보았다.
지금은 종이만화책이 사라지고(일부 마니아를 위한 애장판이 나오고 있다) 한 회 연재분량이 짧은 웹툰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 시절의 순정이 사라지는 것인가 싶어 마음이 아프다가도 이 시절 등교하는 지하철 안에서 코를 박고 열심히 만화를 보는 아이들이 있겠지, 싶어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의 한 시절, 가장 순정했던 사랑도(현실의 몸을 입고 있지 않아서 더더욱 깨끗하고 이상적인 사랑이) 만화 속에 있었다. 나를 보듬고 달래고 위로하며 키웠던 요람같은 것.
그러니 나에게도 이건 순정! 그야말로 순정이다. 90년대 순정만화를 보며 피의 일부를 정화했던 동족이라면, 당장 달려와 이 책을 펴길. 그 시절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해주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