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심장이 유리그릇으로 만들어졌다고 느낄 때가 있다. 지금 그릇이 깨어지고… 난 산산조각나 있어. 속에서부터 피비린내가 올라올 때, 미친듯이 소리지르며 알몸으로 광장을 가로지르는 누가 있어 맹렬하게 나를 사로잡을 때, 공허한 전생과 살인마의 전전생과 끔찍한 꿈이 심연에서 기어나와 목을 움켜쥘 때, 영혼을 달래듯 간절하게 말한다. 괜찮아, 상처받지 마. 괜찮아.
인간은 가진 에너지의 20%를 뇌활동에 쓰지만 뇌 기능은 극히 일부만 활용한다고 한다. 만약 인간이 뇌를 100% 쓴다면 영화 <루시>처럼 육체를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루시는 운이 좋았다. 그녀는 깨달음을 얻고 몸을 버렸으니까. 그러나 일반적인 우리라면 100%까지 가기도 전에 미쳐버리지 않을까.
그러므로 <진정한 느낌의 시간>은 어떤 의미로는 지옥이다. 그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느낌>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번이라도 감각할 수 있을까? 경멸로 피로로 환희로 관찰하고 관찰당하지만 고백하고 버림받고 다시 고백하고 자살을 시도하고 하지만 실패하지만 코위쉬니히는 어떠한 실감도 느끼지 못한다. 무수한 감각이 그를 저주받은 뱀처럼 핥고 지나가지만 그는 무료하고 공격적이다. 그가 살인자라면 그는 그의 목을 스스로 조르는 살인자다.
그가 주변의 인간에게 살의를 느끼거나 무료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무의미하며 또한 과잉상태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생각은 감각을 정제시켜 생각으로 인한 충격은 대체로 치명적이진 않다. 그러나 감각은 미처 대비한 시간도 주지 않고 몸을 열고 들어와 휘저어버린다. 그러므로 그가 느끼는 대부분의 '진정한 느낌'은 그의 생존을 치명적으로 위협한다. 그가 스스로를 살인자라고, 구제불능의 쓰레기라고 규정지으며 사라져버리고 싶은 것도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사람을 거절하고 (혹은 거절당하고) 그가 유일하게 안식을 얻은 곳은 아이의 옆이다. 하지만 아이는 사라지고 그는 죽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죽지도 못한다. 그는 한없이 무의미하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다.
<진정한 느낌의 시간>은 단 한번도 진정한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한 인간의 절망과 분노, 그리고 초조를 신체감각의 서사로 풀어간다. 점잖은 어조로 철학책을 읽듯 풀어나가는 '깨달음의 경전' 과는 다르다. 읽는 내내 땀이 나거나 두통이 오고 눈이 아득해지는 등 나의 신체감각도 엉망진창이 되었다. 몸으로 기어가듯 읽었다. 그가 얻은 유일한 방법인 '관찰' 조차 구원은 커녕 일시적인 해결책이나 자기위안도 되지 못한다. 같은 책에 실린 다른 작품 <우리가 서로 알지 못했던 시간>에서는 광장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전지적 시점이 등장하지만 여기서도 결국 패배한다. 그건 코위쉬니히의 시선일지, 작가의 시선일지, 아니면 텍스트가 넌지시 열어놓은 나의 충혈된 눈일지.
모른다. 안락한 거푸집 하나 확보하지도 못했으면서 여전히 허위의 시간을 사는 나에게. 문득 스쳐지나가는 이 불안은 대체 무엇일까.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