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신기하기도 하지. 여행의 기억은 대체로 스토리가 없다. 성능 나쁜 영사기가 툭툭 잘라먹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맥락없는 감각들이 이어진다. 눈이 아플만큼 선명한 색이나 코를 찌르는 냄새, 황급히 모퉁이를 돌아 뱉어버린 음식의 강렬한 맛이나 햇빛이 풀어지듯 몸속을 돌던 뜨거운 술의 촉감처럼. 버스에서 졸다가 어지러워 눈을 뜨면 몽롱하게 펼쳐지던 풍경들. 내겐 교토의 허름한 아파트 베란다에서 나부끼던 빨래의 색, 가로등 하나 없는 타이완의 골목을 가로질러 기적처럼 만난 딤섬 가게에서 흘러나오던 훈김, 섬진강의 은빛 물결 위로 거짓말처럼 사뿐히 내려앉던 꽃잎들,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면 따라 부르며 쫓아오던 강릉의 파도 - 이런 여행의 심장.
여행을 마치고 시간이 흐를수록 감각들은 점점 더 짧고 강렬해진다. 너무 일찍 일어나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으면 파리의 푸른 새벽이 창으로 오곤 했다. 그건 머리를 푼 여자처럼 실체가 있어서 나는 살짝 몸이 굳어 새벽의 텅 빈 눈을 마주하곤 했다. 가운데가 텅 빈 유럽 특유의 공동정원이 있는 아파트 구조였기에 커튼을 꼼꼼하게 치지 않으면 건너편 창 안의 사람과 눈이 마주치곤 했다. 그런 새벽의 기억 이후로 바로 시장 골목의 꽃집이 떠오른다. 한다발에 일유로나 이유로, 싸고 아담한 꽃다발을 들고 어디론가 가던 사람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등.
그런 감각들이 질문처럼 느껴졌을까. 아니면 이야기꾼의 숙명일까. 소설가의 시칠리아 여행은 어떤 것도 질문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왜 제목은 <오래 준비해온 대답>일까. 아니면 그 여행이야말로 모르는 사이 무뎌지고 닳아버린 '그 안의 어린 예술가'에게 내어줄 대답같은 것이었을까.
둘 다 아니었으면 한다. 여행은 그저 떠나고 머물다가 돌아오는 일. 혹은 돌아와 머물다가 다시 떠나는 일. 시칠리아 사람들의 사는 방식처럼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하지만 얽매이지 않고 바람처럼 사는 일. 머무는 자들의 눈에 왔다가 가는 자들이 어떻게 비치는지 나도 그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자의 마음은 안다. 나도 여행자였기 때문에. 한순간 아무 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의 왁자지껄한 고요에 기꺼이 귀멀어 행복하던 마음을. 이방인의 마음을.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그와 함께 머무르고 떠나며 나는 여기서도 단속적인 이미지들을 더듬어낸다. 이야기꾼이 풀어내는 여행기도 그렇다. 결국 여행이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저도 모르게 바다에 빠뜨리고 기차역에 잃어버리고 바람에 놓치는 것. 잃어버린 것이 없다고? 잘못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나 많은 것을 잃어버려서 그 여행이 이토록 소중했다.
커다란 섬은 바닷가와 내륙을 동시에 품고 있어 양가적인 삶이 공존한다. 거칠고 낙후된 시칠리아의 더위 속에 트렁크를 들고 망연자실 서 있었다면 나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막막했겠지만, 부드럽고 세련되게 이어지는 여행이었다면 거기서 건질 것은 우울과 센치멘털 정도가 아니었을까. 땀냄새 나는 남부 유럽, 적도 근처의 폭염, 뜨거운 한낮의 태양은 그야말로 강력하다. 단숨에 사람을 끌어들인다.
시칠리아의 풍성한 해산물과 싸지만 맛있는 와인을 곁들여 가로등도 없는 거리의 식당에서 저녁해가 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런 느긋한 일상을 훔쳐서 거기 잠깐 머무르고 싶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의 하루에 이물질처럼 끼어들어 잠시 타인이 되는 경험. 그런 '살아봄으로의 여행' 을 하는 이들이.
올봄, 각국의 공항이 폐쇄되고 거짓말처럼 모든 길이 막혔을 때 나는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를 샀다. 가지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단단한 가방이었다. 그건 내 영혼의 바리케이트와 같았다. 육체가 병드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포기하는 것을 막는.
그리고 생각한다. 올 일년, 우리는 서로를 많이도 상처입혔고 어떤 상처는 돌이킬 수 없을지 몰라도, 동시에 우리는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고 위하고 내어주면서 사랑했노라고. 힘들고 괴로울 때야말로 사랑할 용기가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충전한 사랑을 안고 나도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들려주려고 떠날 것이다. 내 영혼의 바리케이트를 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