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언어로 '종특'이라는 말이 있다. '종족의 특성'을 줄인 말로, 주로 한국인 특유의 어떠한 현상을 일컬을 때 쓰인다. 이러한 줄임말들이 대개 그렇듯 긍정적인 느낌으로 쓰이진 않는 것 같다. 비아냥거리거나 자조할 때 주로 쓰인다.
나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는 아니다. 워낙 굴곡이 많은 근현대사를 지나온 나라라 어려움 앞에서 놀랄 정도로 똘똘 뭉쳐 함께 이겨내는 한국인들이 외국, 특히 개인주의자가 많은 서방의 눈으로 봤을 때 워낙 특이해보이긴 했겠지만 나는 그 단결력이 약도 되지만 때로는 독도 된다고 생각한다. 잘 뭉친다는 것은 잘 튕겨낸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대한민국은 열정적이고 역경을 이겨내는 용기도 대단하지만 차별과 배척이 가장 심한 나라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와 '남'을 가르는 것, '우리'와 '우리 아닌 이'를 가르는 것에서 차별과 배척이 나온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무리를 찾고 자신과 비슷한 이들과 어깨를 나누며 서로 의지한다. 단일 개체로는 도저히 이 엄중한 생태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무리지음은 나눔이 아닌 독점으로 이어져 타무리를 배제하는데 이르게 된다. 우리는 두 번의 세계대전, 아니 그 이전의 수천 년 동안의 피비린내나는 인류사를 통해 이것을 배워왔다. 이제 인간은 생존을 위해 무리를 둘러싼 울타리를 허물어야 한다. 국경은 사라져야 하고, 인류는 인간이라는 종명 아래 하나가 되어야 한다.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질병에 대처하는 나라 단위의 이기주의로는 이 환란을 진정시킬 수 없듯이. '인류애'가 아닌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를 무너뜨려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여러 의미로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한국적' 과 '환'. 환은 幻 이니 환상, 신기루, 허상, 있지 않은 꿈, 그러나 생생하고 매력적인 형상이리라. '한국적 서정' 이라는 것을 저자는 단호하게 '환'이라고 한다.
예술의 세계엔 국경이 없다, 라는 말을 종종 하고는 하지만 언어예술인 문학의 경우는 좀 특별하다. 나라마다 거쳐온 시간의 질곡이 달라 인간의 삶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문학은 거기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을 비추고 그것을 다시 응시하면서 작가의 마음과 몸이 거울 속에 섞였다가 분리되는 순간 시의 서정은 탄생한다. 그리하여 '한국적 서정'은 마땅히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 문학의 특이점이다. 다만 이 특이점은 인류 보편적인 어떤 열망과도 연결되어 있을텐데, 우리의 연구가 거기 닿아 있는가에 대해 저자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거기 있는 '한국적 서정'의 뿌리가 시간의 지층 아래, 인간의 영혼 아래, 빛나는 보편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여정을 떠나지 않아 결국, '한국적 서정'은 실제와는 다른 '한국적 서정'으로 명명되었다. 이 명명이야말로 '환'이라고. 그리고 그 환의 울타리는 매우 견고해 새로운 창작을 독려하는 '독법'을 개발하지 못하고 새롭게 읽히지 않는 작품들은 저 거대한 영혼의 금빛 수원에 닿지 못해 말라가고 있다고.
다소 생경하고 때때로 억지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깐깐함으로 먼 옛날의 시부터 오늘날의 시까지 읽으며 나는 어지럽게 찌푸린 어느 독자의 미간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시는 비밀을 품고 있지만 그 열쇠구멍은 읽는 순간마다 달라지는 마법에 걸려 있어서 열고 들어가면 늘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곤 한다. 이 천변만화의 비경에서 규칙을 찾아내려는 무모한 모험자가 평론가이다. 그래서 평론서를 읽을 때는 늘 숨쉬기가 힘들다. 힘이 바짝 들어간 어깨며 등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기분이 든다. 고급스럽긴 하지만 대체로 싸움꾼이다. 정밀한 도둑이기도 하다. 평론가는 늘 실패하고 그가 발견했다고 믿는 보물을 경배한 후 빈손으로 돌아서 나올 밖에는 도리가 없다. 이 허탈한 싸움은 보는 사람도 힘들게 하지만 그의 탐험을 따라가는 기분은 즐겁기도 하다. 생각이 다른 지점은 접어두고 나중에 한 번 더 펼쳐보기도 하고, 아아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맞장구치는 즐거움도 있다.
570 페이지에 걸친 이 모험기도 매우 즐겁다. 그는 교정과 쇄신을 말했다. 흔치 않은 관점에서의 질문이기는 하다. 그러므로 싸움꾼은 정중하게 장갑을 던지고, 누구도 죽지 않는 결투를 제안하니. 독자와 작가 모두 이 싸움에 진실로 임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