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 <식물의 책>

by 별이언니

포도를 먹고 나면 손가락 끝에 검붉은 물이 들었다. 잘 지워지지 않는 포도물을 쪽쪽 빨면 여름이 왔다.


코트에 목도리, 장갑까지 중무장을 하고 비탈길을 내려오다가 기름진 녹빛 잎에 놀라 발을 멈췄다. 주먹만한 동백이 벙긋 피어 있었다. 겨울에 만나는 꽃은 거기 피어 있음을 알고 있더라도 마음에 빛이 들게 한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아름다운 날들엔 식물이 있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고 도시에서 늙었지만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곁엔 식물이 있었다. 시름이 깊은 날 창을 열면 나무가 푸른 향을 흘려주었고 야근을 하고 지쳐서 버스에서 내리면 목련이 흰 그늘을 깔아 집까지 손을 잡고 데려다주었다. 신촌에는 내가 좋아하는 벽돌담이 있는데 봄이 되면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핀다. 그 사이에 있는 높은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들의 희고 단단한 종아리를 사랑했다.


여행을 가면 첫날 꼭 식물원에 간다. 이국의 땅에 발을 디뎠으니 토지신에게 인사를 드리러 간다는 희안한 핑계를 대지만 사실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잎과 꽃, 나무의 형태가 신기해서다. 더운 지방은 수목이 크게 자라고 꽃도 크고 기름지다. 추운 나라엔 잎이 넓고 우람한 식물이 귀해서 어쩌다 만나는 나무나 꽃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하지만 식물을 잘 기르진 못한다. 멀쩡한 줄 알았던 선인장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더니 물을 뿜으며 장렬히 전사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지인들에게 놀림거리다. 내가 물을 많이 마시는 편이라 그런지 늘 물을 많이 줘서 애꿎은 식물을 많이도 죽였다.


솜씨는 없지만 애호가, 친해지고 싶은 마음만 한가득인 나같은 사람에게 이 책은 보물과도 같다. 딱딱한 학술서가 아니라 식물이 품고 있는 온갖 이야기들을 친근하게 풀어줘서 마치 일생일대의 소개팅 직전에 중요한 정보를 손에 얻는 듯 흥미진진하다. 게다가 이토록 정교하고 아름다운 세밀화라니! 세밀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글을 읽다가도 저절로 그림으로 눈이 미끄러졌다. 활자중독자에게는 보기드문 일이다.


잎 사이에 숨겨져 있던 이런 씨방도 있구나,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네, 잎맥이 이렇게 어여쁠 수도 있구나.... 첫눈에 반한 사람을 창피한 줄도 모르고 살피며 혼자 감탄하고 다시 열애에 빠지는 심정으로 이 섬세한 그림들을 보았다. 애정과 신념이 없다면 절대 그릴 수 없는 그림이다.


곁에 늘 있던 친구와 다시금 손을 잡은 기분이다. 우리 손잡고 어디 놀러갈래? 우리가 함께 놀러갈 미래가 너에게도 나에게도 밝고 신선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직면한 이 모든 위기를 현명하게 이겨내고 고생대부터 살아온 나무들과 미래에도 함께 하기를. 지구 위로 무성하게 번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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