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엔 프리엘 극본, 극단 제비꽃 공연 <그 후>

by 별이언니

"평생 기다리기만 하는 삶, 대기실의 인생이라니!" 그는 탄식하고,


"아뇨, 나는 이해할 수 있어요. 난 알 수 있어요." 그녀는 손을 맞잡는다.


연극이 끝나고 어두운 골목을 걸어내려오다가 손에 들고 있는 리플렛을 보았다. 최창근 드라마투르기는 거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살아가라, 희망없이.


발목이 사라지는 감각을 느낀다, 종종. 아래를 내려다보면 형태가 온전한 다리가 신발을 신고 땅에 안정감있게 붙어있는데, 신발이 감추고 있는 나의 발은 어떻게 된걸까. 나는 실뿌리 몇 가닥을 겨우 땅에 내리고 부유하듯 견디고 있는 식물이 아닐까.


이미 희망이 없는 은행의 대출서류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한숨을 쉬지만 그녀에게는 종종 타오르는 눈을 품고 술냄새를 풍기며 찾아오는 남자가 있어 아직 더 살아가야 하고, 마르고 창백한 그녀를 보고 왠지 모르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말을 붙이고 싶었던 그는 묘하게 딱딱한 표정으로 그녀가 사라진 허공에 손을 내민다. 바이올린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파고든다. 아름다운 연주지만 인생에서 음악은 늘 불협화음이다. 그녀가 부드럽게 떨리는 마음으로 끌어안은 희망은 불안이고, 근사한 삶을 거짓말로 꾸며대지만 이미 노회한 남자는 희망 없이 사는 법을 깨달은 걸까. 희망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할까. 희망은 불안의 다른 이름, 기망의 자궁, 희망은 불치병이다. 아무리 도망쳐도 귀신같이 찾아와 멱살을 잡아끄는 채권자다. 우리는 어떻게 희망을 탈출할 것인가.


아무리 닦아도 어느새 얼룩이 지는 거울을 바라보며 내 얼굴의 구멍들을 어루만진다. 그것은 표정, 내가 지하철역 화장실의 선반에 두고 나온 것, 유실물 보관소의 선반에서 2019120529877457 번으로 등재된 것. 희망에 저당잡히느니 자발적으로 잃어버리기로 선택한 것. 살아가라, 희망없이. 나는 중얼거린다. 그리고 곧 입술을 깨물고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거울을 닦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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